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지명유래

Home > 대덕면 안내 > 지명유래 인쇄

梅山里 社倉마을

사창마을은 300여년전 연주 현씨와 광산김씨가 일시 거주하다가 이거한후, 1520년경에 전주이씨가 다시 터를 닦아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뒤로 매봉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고 동남쪽으로는 만덕산을 마주보며 서쪽으로 정제등이 있으며 정제등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전설이 서린 바리봉이 남쪽에 있다.
옛날엔 마을주변에 감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감나무골, 혹은 시곡이라 불렀으며 또한 사당리라고도 하였으나 담양부가 관리하던 곡물 보관의 외창이 마을앞 서적골에 서게되어 그때부터 사창리라고 불러 오늘에 이르렀다.

>梅山里 藤葛마을

1507년경 전주인 이서공 추성수를 중심으로 한 그 일가가 고서면 후산 마을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개척당시 수백년 묵은 칡덩굴이 휘덮고 있어 등갈이라 이름 하였다는 말이 전해온다. 처음 터를 닦기 위해 땅을 파헤쳤을 때를 기다리던 송아지가 세상에 나왔다는 명당정설이 전해오는 가운데 판사, 경찰서장등 자연마을단위로는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긍지를 갖고 있는 이 마을은 39호에 103명이 살고 있다.

梅山里 大鳥마을

대조동 마을은 약 450년전 전주이씨가 정착하였고 지세가 천학하전의 명당터로 천년을 더 산다는 학이 하늘에서 내려온 터라하여 대종동 또는 한새울이라 불렀으며 설매 또는 한매라고도 하였다.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이 많은 마을터로 서쪽 진등 노서하전 명당터에 면사무소가 세워졌으며 부근 매화낙지 명당터엔 만덕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문화재로는 전라남도지정54호 몽한각이 있는데, 몽한각은 조선조 태종의 5세손인 이서가 1507년 창평으로 유배되었다가 1520년 유배에서 풀려나 이곳 매산리에 머물어 살았는데, 1803년 담양부사 이동야와 창평현령 이훈휘가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梅山里 新葛마을

신갈마을은 마을이 생기기 전인 1978년전까지는 인근 득인산 동편 기슭에 잇닿은 야산이었으며 인근 사람들은 옛부터 이곳에 물팍등이라는 명당터가 있다고 믿어왔고 그리하여 우괴동 혹은 물팍쟁이라고도 부르는 곳이었다. 1978년 정부의 농촌근대화시책에 고속도로변 환경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취락구조 개선사업이 시작되었을 때 당시 도지사가 현지확인중 농촌문화 취락적지로 선정하였다. 1978년 부근 일대의 토질이 적벽돌 제작의 적지로 판정되어 호남 적벽돌 새마을 공장이 건립되었으며 우량벽돌로 인정 받아왔다. 마을 뒤쪽이 식물원으로 조성되어 경관이 수려하고, 앞에는 호남고속 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이 마을은 39호에 129명이 살고 있다.

獐山里 大小山마을

대소산 마을은 500여년전 충청도 지방에 살던 육행공 관산인 김처겸이 동문수학했던 밀양인 박양산과 함께 터를 잡았다. 매봉의 정기가 뻗어 내리다가 한데 모아진 서당재 아래 득인산을 마주바라보며 못살아도 오가리솥은 면하고 큰 인물을 얻을 수 있다하여 터를 닦았으며 동서로 밀양인 박씨가 잡은 터를 소산, 광산인 김씨가 잡은 터를 대산이라 하였다. 광산김씨 문중에서 대소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한 사람이 많아 그때마다 마을앞에 세웠다는 솔대가 열두개나 되었으며 당시 고을원님 현감도 그 앞을 지날때는 반드시 절을 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1981년 광역권사업으로 길을 확장한 마을앞 “매비선”은 비차리, 창평 장화리로 연결되는 군도이며, 현재 34호에 87명이 살고 있다.

獐山里 獐洞마을

1952년경 평강채씨가 개척하여 안양동이라 부르다가 1471년 대곡리로 개칭하여 1624년경 구화동으로 불렀으나 마을 뒷산이 노루형상이라 하여 장동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재 부르고 있는 노랑골은 노루골에서 변형된 이름이다. 주요 인물로는 고려말 정승을 지낸 평강인 고성군 채문무의 태생지이며 조선 선조때 미암일기를 저술한 미암 유희춘이 기거한 곳이다. 전원생활을 즐기는 외지인의 정착이 늘어가고 있고 31호에 80명이 살고 있다.

비차리 차동마을

차동마을은 450여년전 하동정씨가 처음 입주하였으며 뒤이어 홍양이씨와 김해김씨가 들어와 터를 닦고 정착하였다 전한다. 마을의 형세가 하늘에서 금비녀가 날아와 떨어진 명당이라 하여 비차동 또는 차동이라 하였다. 1970년 마을주민 25명이 사치와 낭비를 없애고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하자는 목적으로 조직한 월무계원들이 세운 영월정이 있다. 조선조 명종때 담양부사 김희필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할 때 심었다는 당산목이 지금도 마을입구에 자리하고 있어 당산제를 지내고 있으며 정월 대보름이나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농악놀이가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비차리 가흥마을

가흥마을은 200여년전 이웃마을인 대산마을에서 살던 광산김씨 일가가 옮겨와 터를 닦았다가 창녕조씨 일가가 다시 일궈 정착하였다. 처음에는 감골이라 불렀으나 주변 산세가 아름답고 맑은땅이라 하여 가흥동이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옛부터 주민들은 민심이 순후하고 효행이 지극하여 효자, 효부, 열녀가 끊이지 않았으며 남을 시기하지 않아 예의 바르고 조용한 마을로 알려졌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불행의 6.25사변때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도 민심이 후덕한 때문이었다고 전해온다. 마을주변 토질이 좋아 도라지등 특용작물을 많이 재배하고 있으며, 현재 15호에 44명이 살고 있다.

錦山里 撫月마을

무월마을은 고려말기 교동 인씨들이 처음 입주하였으나 흥성하지 못하고 조선조 초기 흥성 장씨들일 다시 개척하여 정착하였다고 전한다.마을 옹기를 구워 점등이라고 불렀으며 옹점리란 마을 이름은 이때 붙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1968년 만덕초등학교 분교인 금당초등학교가 설립되었고, 1983년 보건진료소가 개설되어 의료혜택도 다른 마을에 비하여 빨리 받게 되었다. 현재 44호에 129명이 살고 있다.

錦山里 시木마을

시목마을은 조선조 중엽 금녕김씨와 금성나씨가 입주하여 개척하였다고 전한다. 선도들의 생활습관을 지켜 내려오는 정신이 강하여 특히 당산제를 통하여 마을 주민들의 단합을 일깨우고 있기도 하다. 지형적인 기후조건과 피나는 노력의 결실로 1993년 대덕단감영농조합법인이 설립되면서 단감나무 단지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현재 25호에서 단감 31㏊를 재배하고 있으며 58호에 171명이 살고 있다.

聲谷里 聲谷마을

성곡 마을은 1520년경 밀양박씨와 창녕조씨 일가가 입촌하여 정착하였으며, 당시 마을 남쪽에 위치한 옥천동의 옥천사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의 덕을 입어 마을이 시시로 번창한다 하여 성신리로 불려 오다가 1910년경 성곡리로 개칭하였으며 일명 새말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마을 앞을 지나는 고속도로 건너 산에 베틀굴이라 부르는 동굴이 있는데, 임진왜란때 부근 여러마을 사람들이 이 굴속에 피신하여 베를 짜며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1973년 마을 앞으로 호남 고속도로가 개통되었으며, 1975년 새마을 사업 우수 마을로 선정되어 대통령으로부터 하사금 250만원을 받아 마을 공동답 1,800평을 마련하였고, 1980년 마을 회관을 건립하였다.

雲岩里 下雲마을

하운 마을은 만덕산 북쪽 기슭아래 밀양 박씨 일가가 처음 입주하여 번성하면서 북촌이라고 이름 하였으나 시대의 미상에 폐허되고 바로 아래쪽인 지금의 터로 옮겨 번성 하였다. 일제 시대 일본의 박해에 항거하던 마을 청년들이 애국하는 옥류대를 조작하고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1945년 일본이 망하자 마을 정자옆에 해방 기념비를 세워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마을 뒤 만덕산 산정에 1920년대까지 가뭄이 들때면 기우제를 지냈다는 무잿등이 있으며 저수지 부근인 주산에 애기당이라는 샘이 있는데 자식을 낳지 못한 부녀자가 이 샘을 찾아 기원하면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현재 44호에 143명이 살고 있다.

雲岩里 上雲마을

상운 마을은 만덕산 등허리를 구름이 감싸고 있다하여 운암리라고 부르며 산 안으로 위쪽에 있다하여 상운이라 하였다. 500여년전 평산신씨와, 순흥안씨 일가가 처음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월봉산 남쪽으로 이어지는 국수봉 아래를 ‘바람 난 골’이라 부르며 이곳은 일제시대부터 1986년까지 중석이 생산되었으나 중단되었다. 주민들이 퇴비증산에 열성적이어서 해마다 군내 퇴비증산 경진 대회에서 상을 받은 퇴비증산 우수 마을로도 유명하다. 현재 23호에 74명이 살고 있다.

雲岩里 八鶴마을

팔학마을은 1926년경 김해인 김창호와 광산인 이병호에 의하여 개척되었고 1950년 6.25사변이후 외지에서 이거하여 온 사람들이 많아 증촌되었다. 팔학마을은 당초 지형이 학처럼 생겼다 하여 팔학으로 지칭되었으나 마을 주변에 도로가 개설되면서부터 마을에 우환이 있자 팔학으로 개명하였다 한다. 1978년 취락구조개선사업을 벌여 재래식 주택을 문화주택으로 개량하여 환경을 크게 바꾸었고, 현재 24호에 60명이 살고 있다.

文學里 內文마을

내문 마을은 신라말엽에 생겼다고 전해오나 확실하지 않고 연대 미상에 광산 김씨, 금성 나씨, 밀양 박씨 일가가 살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마을앞 만덕산에 농바위라 불리는 큰바위 밑으로 아주 큰 굴이 있었는데 난리때는 인근 주민 만여명이 피난하여 목숨을 구했는데 이때 만인이 산의 덕을 입었다 하여 만덕산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1979년 취락구조개선사업으로 19동이 이태리식 문화주택으로 개량되었으며 마을회관이 신축되었고, 현재 33호에 84명이 살고 있다.

文學里 外文마을

외문마을은 만덕산을 남으로 등지고 북으로 매봉산을 바라보며 위치한 면내 유일의 전 주택이 북을 향해 있는 반월형 마을이다 1470년경 곡성군 오곡에서 살던 해주 오씨 일가가 이주해와 개척하였다고 전하며 마을 이름을 외문치, 밖문재, 분문재, 밭동구등으로 불리다가 다시 외문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500여년 묵었다는 당산나무는 매년 잎이 무성하면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들고, 잎이 조금씩 여러번 피면 가뭄이 왔다는 신비로운 전설이 전해오기도 한다. 1977년도 취락구조개선사업으로 노후주택을 전부 철거하고 마을터를 재 정리하여 문화주택 38호를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현재 34호에 114명이 살고 있다.

龍坮里 龍坮마을

용대 마을은 고려말엽 송도에서 남하하여 은둔지를 찾던 성명 미상의 왕씨가 처음 터를 잡았으나 번성하지 못하고 조선조 중종때 남평 문씨와 전주 이씨가 정착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많은 사람이 찾아들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가재제 윗쪽에 자리잡고 까치가 많아 가재동 또는 가작동이라고 불러 왔으나 마을에 이유없이 불이 자주 나므로 담양부사에게 그 사유를 고하니 부사가 직접 찾아와서 지세를 살피고 비룡의 형이라 하여 용대라 개칭하여 주었다 한다. 1968년 가재제가 축조되었고, 1977년 간이상수도가 설치되었으며 1985년에 보건진료소가 건립되어 벽지 진료혜택을 받고 있다. 현재 43호에 93명이 살고 있다.

龍坮里 靑雲마을

1870년경 경기도 여주에 살던 밀양인 박재호 일가가 사화를 피하여 남면 경상리로 이거하여 살면서 보다 좋은 명당터를 찾던 중 이곳 산수가 청운의 서기가 있어 필시 운중발룡이 할 지세로 가히 안주할만한 곳이라 믿고 정착하였다고 한다. 마을이 생기기 전에 이 터에 내운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주변 곳곳에서 옛 기왓장이 자주 출토되고 있다. 그 뒤 김해김씨 일가가 들어와 같이 개기하였으며 마을 이름을 청운동이라 하였다.

龍坮里 水谷마을

수곡 마을은 조선조 초기 마을 북쪽에 있었다는 옥천동 옥천사에서 일하는 기와공인 김포 공씨와 남평 문씨가 터를 일구고 살기 시작하였다. 남과 북으로 사이를 두고 방아제 마을과 바쟁이마을이 형성되어 두 마을을 합쳐 수곡이라 한다. 현재 12호에 18명이 살고 있다.

葛田里 下葛마을

하갈 마을은 300여년전 현풍 곽씨가 처음 터를 닦았다고 하며 그후 나주 다시에 살던 수성 최씨 일가가 복된 자리를 찾아 다니다가 이곳에 이르러 적덕봉에 선인독서라는 명당이 있다는 설을 듣고 정착하였으며 마을 주변에 칡이 많이 자생하여 칡골이라 부르다가 다시 갈전이라 불렀으며 1908년경 윗마을 상갈과 불리도어 하갈마을로 되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동복천은 화순 북면 맹리, 월곡부락과 군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 적덕봉 아래로 수성천이 흐른다. 마을 뒤로는 황새형국인 곤매산이 있으며 마을앞 주 농경지는 모래보들과 고라보로 불리운다.

葛田里 上葛마을

상갈마을은 시대 미상에 남원 윤씨 일가가 입주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마을이 개척되기전 온 산야에 칡이 많아 자생하여 갈밭이라고 불리었으며 다시 두 마을로 분리되어 상갈이라고 하였다. 1930년 일제시대 마을앞에 학교가 세워져 용산간이학교라 불렀는데, 건립 당시 북쪽의 용대리, 남서쪽의 운산리의 명칭을 하나씩 따서 용산간이학교라 하였고, 1944년 용산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雲山里 楮深마을

저심 마을은 500여년전 전 김해 김씨가 처음 입주 정착하였으며 마을 뒤 큰산이 돼지 형국으로 돼지 혈이 길게 뻗은 곳에 자리 잡았다하여 저심이라 부르다가 또한 한지 재료인 닥나무가 인근에 많이 자생하여 한지를 생산하였으므로 다시 글자를 바꿔 저심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마을 서편의 금계봉은 임진왜란때 주민들이 화를 면하기 위해 이곳 바위 동굴로 들어가 베를 짜며 살았는데 왜병들이 베짜는 소리를 듣고 무슨 새소리가 이토록 아름다운가 하고 탄복하여 그냥 지나쳤다하여 금계봉이라 이름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雲山里 山亭마을

산정 마을은 400여년전 고씨 일가와 이씨 일가가 난을 피하여 심심산중으로 들어 오던중 수양산의 정기가 이 터에 서렸다 하여 정착하였다 한다. 마을 뒤로 소규모 경작지가 있는 가작골이 있고, 서편으로 1950년 초에 완성된 100여두락을 몽리할 수 있는 산정 저수지가 있으며, 부근을 오작골이라 부르고 마을 앞들을 대바우 골이라 부른다. 뒷산 수양산에 지상양지라는 명당이 있어 하늘에서 내려온 옥녀가 약수에 목욕하고 베를 짜고 살았다는 전설어린 옥녀골이 있으며 앞산 앵무봉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인들이 글을 읽었다는 선인독서라는 터가 있다.

立石里 立石마을

입석 마을은 조선조 중엽 광산 김씨와 전주 최씨 일가가 난을 피하여 은둔하며 살 땅을 찾아 깊은 산속으로 들어 왔다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다른 산촌과는 달리 바위가 곳곳에 수직으로 서 있는 것이 많아 마을을 지켜주는 석신으로 모시고 제를 지내 왔으며 마을 이름을 선돌이라고 불렀다가 지금은 입석이라 한다. 북쪽마을 입구와 마을 앞에 각각 두 개의 선돌이 있다. 동쪽에 수양산, 서쪽에 국수봉이 있으며 마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도장골, 개탕골, 성적골, 안양골, 진지평 남서쪽으로는 한 대골, 지자골, 우동 한수골, 북쪽으로 수락골, 서북쪽으로 바다골이라 부르는 지명이 있다. 마을 입구에 창촌당시 심었다는 당산나무가 길게 서 있어 마을 북쪽에서 들어오는 잡신을 막아 불행을 없애 준다고 믿어 석신과 함께 당산제를 지네는 풍습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한때는 울창했던 당 산나무가 지금은 느티나무 2그루와 서나무 30여 그루가 노거수로 남아 있다.
<군지 및 자료제공자 : 담양향토문화연구회, 정보출저 : 옛땅 옛터 옛이름, 저작권자 : 이해섭>
지명유래 메뉴 QR코드, URL : http://www.damyang.go.kr/index.damyang?menuCd=DOM_000000903002000000

현재페이지에서 제공되는 서비스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만족도 정보 입력
정보 담당자 :
대덕면 총괄  

결과보기

만족도조사결과 (참여인원:0명)

요약설명보기

만족도 조사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재 페이지의 만족도 투표는 총 0명이 참여하였습니다.

닫기

  • 매우만족
    매우만족0표
  • 만족
    만족0표
  • 보통
    보통0표
  • 불만족
    불만족0표
  • 매우불만족
    매우불만족0표

결과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