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설화

금성산성 관련 설화 스토리텔링

1. 이천골(二千骨)과 연동사(烟洞寺)

정유재란 때 금성산성은 우리 의병과 왜병(倭兵) 간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계곡물 전체가 피로 얼룩질 만큼 치열했던 격전이 끝나고 왜병이 퇴각한 후 성내에 흩어진 시체를 모아 금성산성 외남문 오른편 계곡에 치우고 보니 시체가 무려 2천여 구에 달하여, 이때부터 계곡의 이름을 이천골(二千骨)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또한, 금성산성 아래 위치한 사찰 연동사는 절벽에 제비 둥우리처럼 자리하고 있어 원래는 제비 연(燕)자를 썼는데, 이곳에서 죽은 가족, 친지 등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들의 원혼을 달래는 향불의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나 그때부터 연기 연(煙)자를 쓴 연동사(煙洞寺)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2. 이영간과 죽엽청주(竹葉淸酒)

죽엽청주는 예부터 담양에서 대나무잎으로 만들어온 전통주이다. 연동사에서 스님들이 건강을 위해 금성산성 일대의 산죽과 각종 약초를 주원료로 한 약주를 빚어 마신 데서 유래하며, ‘마시면 신선이 된다.’고 하여 제세팔선주(濟世八仙酒), 또는 신선주라고도 불렀다. 고려 문종 때 연동사에서 공부하던 이영간이 이 약주를 훔쳐 먹고 동자로 둔갑한 살쾡이에게 비법을 익힌 후 기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담양의 옛 이름이 추성이었던 까닭에 추성주라는 이름으로 민간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오늘날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살쾡이가 소년으로 변한 바위를 소년암이라 부르며, 이영간은 바위에서 동자모습을 한 신선과 함께 장기를 두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3. 전우치와 황금솥, 황금대들보이야기

문헌에 의하면 전우치는 원율현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우치가 어릴 때 금성산성 아래 연동사의 동굴 암자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는데, 스님이 만들어 드시던 술독이 비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우치가 범인을 잡고 보니 여우였는데, 여우는 전우치에게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비결서를 한 권 건네주었다. 이 비결서로 도술을 익힌 전우치는 제비로 변하여 중국의 황실로 날아가서는 가난한 고향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황금솥과 대들보를 훔쳐오다가 매로 변한 중국의 도인에게 쫓기게 되었다. 다급해진 전우치가 황금솥을 떨어뜨린 곳이 현재의 담양댐 위치이며, 황금대들보를 떨어트렸다고 전하는 곳이 지금의 수북면 황금리 벌판이다. 담양댐이 들어서면서 담양에서는 농사 걱정이 없어졌으니 전우치의 소원이 이루어진 셈이며, 행여나 전우치가 묻어둔 황금대들보가 나올까 하고 해마다 농부들이 열심히 경작을 하는 수북면 황금리에서는 농사가 풍년이 되어 황금물결이 넘실거리고 있다.

4. 이연년 형제의 백제부흥운동

이연년은 고려시대 원율현 출신으로 신상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고려시대 참지정사를 역임하고 무신정권의 회오리에 낙향한 이영간의 후손이 그들의 직계조상일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고려 말 최씨 무신집권기에 정권의 가혹한 수탈로 불만이 많았던 농민들을 규합하여‘백제도원수’라 자칭하며, 금성산성에서 동생과 함께 백제부흥을 표방한 민란을 일으켰다. 이연년 형제는 금성산성과 연동사의 노천법당에서 훈련을 하였고, 원율·담양 등 여러 고을의 민중들을 규합하여 광주 등 여러 주와 현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토벌군 대장 김경손을 휘하에 넣고자 생포하려다가 거꾸로 이연년이 김경손의 군대에 의해 살해당하는 바람에, 이연년을 따르던 민중들은 모두 흩어지고 백제부흥운동도 실패하고 말았다. 비록 역사에는 실패한 민란으로 기록되어지고 있으나, 어려운 시대에 뛰어난 인물이 나타나 자신들이 삶을 바꿔주기를 염원했던 농민들의 꿈은 금성산성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이연년 형제에 대한 무용담으로 전해오고 있다.

5. 금성산성과 녹두장군 전봉준

금성산성의 의병장들

금성산성은 험준한 산봉우리를 연결해 만든 천연요새로 예로부터 호국산성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나라가 위난에 빠졌을 때마다 의병활동의 거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해주최씨 석헌 최천범은 의병장 고경명의 휘하에 들어가 담양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중 금성산성으로 출전하자 부인 권씨는 금성산성이 보이는 와룡산 밑에 살았다. 한말 호남의병의 영수 기삼연은 담양읍내에 소재한 일제의 침략기구인 우편소와 세무서 등을 점령한 후 금성산성에 쉬러 들어갔다가 일본군경에 발각되어 탈출하던 중 전북 순창 복흥면에서 체포되었으며, 김태원 의병장의 기삼연 탈환작전을 눈치 챈 일본군이 광주천변에서 불법 총살하여 사망하였다.

금성산성과 녹두장군 전봉준

금성산성은 동학농민운동의 마지막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녹두장군 전봉준의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자 금성산성으로 후퇴했다. 기록에는 장성 백양사로 들어갔다고 나오지만 금성산성 내부의 보국사가 백양사의 말사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봉준은 군량미를 구하러 순창으로 내려갔다가 동지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처형됐으며, 금성산성에서는 격렬하게 저항하던 농민군과 관군의 혈전이 벌어져 수많은 인명손실이 있었다. 그리고 산성의 각종 시설이 불타고 동·서·남·북문의 터만 남게 되었다.

6. 뱀바위, 애기거북바위와 두꺼비바위

금성산성 남문 쪽에서 금성사터 쪽으로 가다 보면 당간지주가 있는 곳을 약간 못 미친 소로의 좌측에 거대한 2개의 암석이 지면위에 노출되어 있다. 앞쪽의 한 개는 그 상부에 일정한 크기로 3기의 비석을 세웠던 듯한 홈이 얕게 파여 있으며 매우 넓적하고 상면이 편편한 암반인데 뱀바위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바위에서 북쪽으로 약 5~6m 떨어진 곳에 있는 큰 바위를 두꺼비 바위라고 부르는데, 마치 두꺼비가 머리를 쳐들고 앉아 뱀을 주시하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이 큰 두 바위 중간에는 애기거북이라고 부르는 작은 바위가 하나 가 있다. 애기거북이가 열심히 바다에서 금성산성에 올라와서는 두꺼비한테 인사하고 있는 형상이다. 말하자면 두꺼비가 뱀에게 잡아먹힐 아기 거북이를 보호하고 있는 형국인 셈이다. 혹은, 뱀에게 쫓긴 개구리라고도 하는데 두꺼비 덕분에 뱀에게 잡혀먹지 않으니 이곳이 좋은 터이며, 실제로 금성산성에는 여름 장마철에는 발에 밟힐 정도로 두꺼비가 많이 나오는 서식지이기도 하다.

7. 봉수대 이야기

금성산성 외남문(보국문) 밖에 돌무더기가 있는 터는 주민들 사이에서 금성산성 봉수대 터라고 불리고 있다. 봉수대는 봉화(횃불)와 봉수(연기)로서 급보를 전하던 고대의 통신방법이다. 지도상으로 전하는 금성산성의 봉수 표시는 발견된 바가 없으나, 금성산성 봉수대와 담양읍 남산의 봉수대가 서로 봉화대로 활용하였다는 이야기가 구전되어오고 있다. 주민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이야기에 의하면 담양읍 남산 정상의 봉수대가 금성산성과 담양부 간의 봉화대로 활용되었고, 무등산을 거쳐 나주목과 관찰사에도 연결되었다고 한다.

8. 노적봉 이야기

금성산성 내남문에서 좌측 성곽을 따라 올라가면 철마봉에 이르기 전에 노적봉이 있다. 이 봉우리가 노적봉이라 불리는 것은 1597년 정유재란 때 금성산성을 수비하는 군졸들이 노적봉에 있는 바위를 수백 장의 빈 가마니로 아래로부터 위까지 돌려가며 쌓아 놓고 속임수를 써서 왜적을 물리친 데서 연유한다. 이렇게 수백 섬에 달하는 곡식을 산중턱에 야적한 것으로 위장을 하자, 왜군은 멀리서 노적을 확인하고는 성 안에는 더 많은 군량미가 비축 되어 있을 것이라 믿고 철수해버렸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이 봉우리는 노적봉이라고 부르고 있다.

9. 애기바위, 거북바위 이야기

금성산성 노적봉 중턱에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거북바위라고도 하고 애기바위라고도 불린다. 금성산성 아래 하성마을에서 전해오는 거북바위 전설은 이러하다. 금성산성을 쌓을 때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산성 쪽으로 기어가는 것을 목격한 부녀자가 놀라서“바위가 기어간다!”고 소리치자 부정을 타서 바위가 그대로 돌아앉아 버렸는데, 장수의 상징인 거북바위가 그 자리에 섰기 때문에 마을이 장수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이 바위가 애기바위라 불리는 이유는 아이를 갖지 못한 여자들이 이 바위 앞에서 빌면 소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단 절대 입을 열지 않고 빌어야 한다. 옛날 금성 어느 마을에 6대 독자 외아들과 금부자라는 늙은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오직 후손을 많이 얻는 것만이 소원이었다. 며느리가 해산달이 가까워진 어느 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날이 밝거든 나를 찾아오되 절대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하고 일렀다. 그런데 이튿날 목욕하고 산신제단을 찾아가던 며느리 앞에 갑자기 앞에서 집채만 한 바위가 걸어오는 것이었다. 너무나 신기해서 며느리가 그만 “바위가 걸어온다!”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후손을 얻고자 하는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아이를 갖지 못한 여자들이 이 바위 앞에서 입을 열지 않고 빌면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전설은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고 말이 많은 것을 경계하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이다.

10. 오현고(五縣庫)이야기

금성산성 안에 있었던 담양부, 순창군, 동복현, 옥과현, 창평현 이 다섯 고을의 군량미 창고를 오현고(五縣庫)라고 한다. 금성산성의 내성 안으로는 1개 마을을 형성할만한 넓은 평야지대가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1688년(숙종 14) 당시만 해도 성내 주민 호수가 136호에 달했으며, 인근 고을에서 거두어들인 군량미가 1만2000석이나 되었다고 한다. 산성 아래 하성마을은 매년 춘추에 걸친 금성산성 의병들의 대군사 훈련장으로 알려져 왔다. 담양, 순창, 창평, 옥과, 동복 등 고을에서 자원 또는 차출된 의병들이 연 2회에 걸쳐 훈련한 곳으로 전해온다. 이처럼 오현고는 금성산성 안의 관군과 의병들에게 참으로 든든한 군량미 창고였다.

11. 빗자루바위

금성산성 외남문 입구 있는 큰 바위는 코끼리 등처럼 넓적하게 생겼다 하여 ‘코끼리등바위’라 하는데, 다른 이름으로는‘빗자루바위’라고도 부른다. 이는 바위에 난 자국이 빗자루로 쓴 것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옛날 외남문 초병들이 쌓인 눈을 쓸고 뒤돌아보니 바위가 빗자루로 쓰러내는 형태로 남아있었다고 하는데, 이후에도 그 자국이 선명하여 빗자루바위, 혹은 대빗자루바위라고 불러오고 있다.

12. 배넘이재 이야기

금성산성 아래 하성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금성산성의 시루봉 중턱 바위어딘가에 뱃고리가 박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마을 뒷산에는 고개가 굴곡이 져서 낮은 부분이 있는데 옛날에는 그 고개로 물이 들어와서 배가 넘어 다녔던 까닭에 배넘이 고개라 불려왔다. 그리고 배너미 고개를 넘어서 좌쪽으로 돌다보면 순창 강천사 방향으로 연대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이 연대사 터 미처 못가서 중간에 있는 고개까지 물이 넘어 왔던 까닭에 이 고개를 무너미 고개라고 부른다. 이렇게 높은 고개에까지 물이 넘치고 배가 다녔다는 이야기가 지명에 남아있는 걸로 보아, 예전에는 금성산성 주변이 바다였다는 이야기가 주민들 사이에서 입으로 입으로 전해오고 있다.

13. 금성산성 승전바위

금성산성은 주민들의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조성되었다. 해발 503m 절벽과 계곡을 넘어서 수백만 개에 달하는 바위와 돌덩어리들을 등에 지어 나르며 철마봉(鐵馬峰)과 장태봉(杖台蜂), 시루봉, 연대봉을 잇는 장장 8km에 달하는 성이 구축되는 과정에 생겨난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있다. 성벽을 쌓는 일은 임란에서 정유재란까지 오랜 전쟁기간에도 계속되었다. 어느 날 나이 어린 두 형제가 병든 아버지를 대신하여 금성산성을 쌓아올리는데 동원되었다. 어린 형제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노역이었으나, 하루빨리 성이 구축되어 나라를 위험에서 구하고 부모와 재회하려는 희망 하나로 부상에도 쉬지 않고 성을 쌓는데 온힘을 다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성이 다 완성되던 날 부상으로 몸이 상할 대로 상하고 기력이 쇠한 형제는 그만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후 나라에서는 두 형제를 비롯하여 성을 쌓다 죽은 여러 희생자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추모식을 가졌는데 이 자리를 승전암, 혹은 형제암이라고 부른다.

14. 금성산성 철마봉

금성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철마봉, 연대봉, 시루봉, 운대봉의 높은 봉우리들을 연결한 포곡식 산성이다. 이들 봉우리 가운데 철마봉에는 특별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금성산성에서 격전이 일어났을 때 철로 만든 말 네 마리를 지금의 철마봉 정상에 동, 서, 남, 북 방향으로 배치하면 적들은 스스로 몰러갔다고 한다. 그 후 이 봉우리를 철마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15. 김덕령과 금성산성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김덕령 장군은 금성산성의 사람이 올라갈 수 없는 험한 바위를 가볍게 올라다니며 무술훈련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인근의 마을주민들에게 구전되어오는 이야기로는 김덕령 장군이 추월산 상봉에서 월산면의 신랑봉으로 뛰어내렸다가 금성산성으로 뛰어내렸다가 자유자재로 뛰어다녔다고 한다. 또한 덕성마을 뒷산의 장군바위에는 김덕령 장군이 말고삐를 매었던 고리구멍과 말발굽 자리가 금성산성을 향하여 뚜렷이 새겨져 있는데, 금성산성에서 훈련하던 김덕령 장군이 말을 내렸던 자리라고 한다.

16. 금성산성 주변마을과 도깨비다리 이야기

금성리 하성마을 주민들은 당초에 성 안에 살고 있어서 성내리 주민이었다. 그런데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성내리 주민들이 이주되어 집단촌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성에서 내려왔다 하여 하성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금성산성은 내부가 넓어 200호가 넘게 살았었는데 산성 안의 민가에서 농사를 지으러 산성 밖 주변의 하성리, 평신기, 원율리, 정각리, 대성리로 내려오곤 하였다. 성 밖으로 나오는 길에는 도깨비 둠벙을 건너야 했다. 이 길은 인근의 마을 주민들이 많이 사용하는 길이기도 하였는데, 둠벙에 놓아둔 징검다리가 큰 비가 오면 떠내려가 버려 애로가 많았다. 그래서 정각산 산신령께 제사를 지내자는 주민들의 합의로 집집마다 제물을 만들어 정성을 드려 제사를 지냈는데 다음날 신기하게도 10여개의 크나큰 돌로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다. 산신령이 보낸 도깨비가 돌다리를 놓았다 하여 도깨비다리라 불렀으며, 댐이 생기기 전까지는 이곳 도깨비 둠벙에서 물을 가져다 농사를 지었다. 지금은 담양호에 수몰되어 볼 수가 없고 이야기만 남아있다.

금성산성과 마을이야기_ 윷판바위 이야기

금성면 원율리 원율마을 뒷산 1km 지점에는 장군들이 말을 매어 쉬게 하고 윷놀이를 한 후 금성산성으로 올라갔다는 윷판바위가 있다. 금성산성에 올라 산성에서 연동사 방향으로 난 등산로를 조금만 따라 가면 좌측에 넓적한 바위가 나오는데, 이 바위 위에 윷판이 그려져 있다.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연동사 동굴암에서 공부하다 도술을 깨친 전우치가 바위 위에 윷판을 손으로 그려놓았다고 한다.

금성산성과 마을이야기_ 공알바위 이야기

금성면 원율리 금성산성 진입로 입구에는 여자의 음부형을 닮은 바위가 있다. 그리고 버실마을 앞에는 왕버들이 왕성하게 자라고 있는데 이 버드나무는 공알바위와 깊은 연관이 있다. 마을 건너편에 일곱거리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여자의 음부를 상징하는 공알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자의 음부와 꼭 닮았다. 옛날 이 마을에는 부녀자들이 다른 남자와 부정한 일을 저지르는 일이 자주 일어나 마을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퍼져서 걱정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을 지나가는 노승에게 마을의 속사정을 말하니 노승은 나무를 심어 그 바위를 가리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노승의 말에 따라 나무를 심고 정성들여 가꾸었다. 그 뒤 마을에는 어떠한 부정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주민들은 다시 화합했다. 지금까지 그 왕버들 나무는 무성히 자라고 있다.

17. 금성산성 육룡(육룡), 용설암(용설암)이야기

풍수지리 보는 이들에 의하면 금성산성은 꾸불꾸불 7,6키로가 새끼를 벤 암룡의 모습으로 담양댐은 수룡의 형국이고, 금성산성은 육룡이라고 한다. 금성산성과 마주 보는 추월산은 호랑이 형국으로 옛날에는 용과 호랑이하고 싸우는 형국이어서 이곳에서 전투가 많이 일어났는데, 지금은 담양댐이 들어서면서 수룡과 함께 서로 즐거워서 노는 용호상조의 형국이 되었다고 한다. 담양댐의 오른쪽 바위산은 가을에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산인데 여의주 형국으로 용과 호랑이의 보물이 여의산이므로 수변공원 조성으로 용과 호랑이가 함께 노는 곳이 생겨나서 태극이 함께 상승하고 점점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뀌고 있다. 금성산성이 육룡의 형국으로 보면 보국문은 용의 입 부분에 해당한다. 그리고 빗자루 바위는 용의 혀 부분에 해당한다 하여 용설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8. 금성산성 연리지 이야기

금성산성에는 큰 바위들이 많은 것과 함께 연리목이 유난히 많은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내남문에서 보국사 가는 입구 사랑바위 주변에는 연리지와 연리목이 열 개가 넘으며, 보국문 근처에는 연리지 노거수가 있다. 유난히 큰 전투가 많아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진 청춘들의 소망과 함께 하지 못한 가족들의 그리움이 산성 안에 수많은 연리지와 연리목으로 생겨났으리라 전한다. 젊은 남녀들이 손잡고 가다가 연리지와 연리목을 보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가족들이 함께 걸으면 화목해지는 길이 금성산성 내성의 연리지 산책로이다.

참고문헌
  • 1. 담양향토문화연구회, 금성산성, 2000년
  • 2. 담양향토문화연구회, 담양설화, 2002년
  • 3. 담양문화원, 담양문화원형대계-담양의 마을이야기, 2013년
  • 4. 담양문화원, 천년담양설화, 2017년
  • 5.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구비문학대계6-17 전라남도 담양군(증편), 2018년
  • 정보 담당자 :
  • 문화체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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