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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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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전라남도 담양군의 읍·면의 지명유래에 대해 자세히 알려드립니다.

담주리(潭州里)

담주현(潭州縣)의 역사적 증현(證現)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담주마을로 이름하였다 하며, 관방제가 축조되기 이전에는 닭전머리라 하였고 전 명성극장 서편쪽에 미나리강이 있어 그 부근의 지명이 되기도 하였다.

천변리(川邊里, 3개로 분구)

영산강 상류인 담주천이 본 마을을 감아 흐른다 하여 천변리라 이름하였다 하며 병문거리, 비석거리, 소전머리라고 불러오던 곳이 있었다.

지침리(紙砧里, 3개로 분구)

옛날에 한지공장이 있었다 하여 지침리라 부르며 지방거리, 조방거리, 효자비거리라 불려오던 곳이 있었다.

객사리(客舍里, 3개로 분구)

조선시대에 관리가 식을 올리고 임금의 명을 받아 지방에 내려온 벼슬아치를 접대 한 곳을 객사(客舍)라 하여 각 고을마다 있었는데, 그 유래를 잇기 위해 객사리라 이름하였고 남정지, 단상거리, 장성배기, 고맹이징개, 삿갓전머리(윗장터), 팽나무거리라 불리운 곳이 있었다.

백동리(栢洞里, 6개리로 분구)

삼거리, 신기마을, 내동, 서당골, 미리산마을로 나누어지며 삼거리와 내동 일부의 서남쪽을 창고등이라 불렀고 백동1리를 향백동이라 칭하며, 주민들은 대부분 대대로 살아온 토착 주민들로 구성되었으나 청전아파트는 주민이 외지에서 입주하여 주민들 상호간의 이질감이 상존, 단일 행정리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청전아파트에 대해서 백동5리의 분구를 2000년 3월 27일 담양군 조례 제1629호로 개정, 동년 5월 1일 백동5리로 하고, 서당골을 백동 6리로 분구 2005.1.1일 담양군조례제 1774호로 개정되었다.
삼거리와 서당골은 고려 중엽 현재의 향백동과 동시에 형성되기 시작한 마을로 추정되지만, 마을의 정확한 형성 연대에 관한 기록을 확인하기는 힘들다. 다만, 1914년 담양군과 창평군이 통합되면서 신기리, 내동, 삼거리, 향배동 일부, 두곡리 일부를 합하여 백동리라 하고, 담양읍에 편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후로 삼거리와 서당골에는 점차 인구가 유입도고, 호수가 늘어나게 되었으며, 1961년 담양군 조례 제2호에 의해 백동리가 백동리 1구와 백동리 2구로 되었다가, 1990년 백동리 2구로부터 미리산이 백동리 4구로 분구되어 나가고, 현재는 삼거리와 서당골만이 백동리 2구에 속한다.

백동리 2구는 담양읍에서 찾기 힘든 인재 교육의 요람이다.
이는 서당골에 담양 국씨들이 입향할 당시 관에서 서당을 지어 학문을 장려했었다고 전해오는 사실, 그후 일제시대에는 삼거리 254번지에 광덕학교를 세워 인재를 키웠었다는 사실, 그리고 1997년 백동리 2구 256-4번지에 담양군 공공도서관이 신축되어 담양군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 육성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사실 등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또한 최근 백동리 2구의 발전 상황은 담양읍 도시발전의 중심 축을 급속히 이곳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농업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당시 관에서 축조하였던 백동리 2구 백동저수지가 1990년 매립되었고, 그곳에는 축산업협동조합, 임업협동조합, 신용협동조합, 농업기반공사, 한국전력공사, 경찰서 등 관내 주요기관들이 들어서고 있다.

남산리(南山里, 2개로 분구)

남산의 산이름을 따서 남산리라 하였는데 그 이전에는 효자리라 불렀고 동정마을에는 황새목이라 불리운 곳이 있으며 조개방죽, 양샘거리라 불리운 곳이 있었다.

향교리(鄕校里, 3개로 분구)

향교가 창건된 후 향교리라 하였으며, 취영마을을 서원리, 향교1리를 행기마을, 광동마을을 원굴이라 불렀으며, 향교3리는 향교2리에 도립 담양대학이 개교함에 따라 운교리 지역에 이주주택단지를 조성하여 이주함에 따라 별도의 취락이 형성되었으나 이 지역 대부분의 주민은 향교2리 도립 담양대학 편입부지 거주 주민으로서 향교2구와의 지연 및 혈연관계가 있어 향교3리로 분구를 희망하여 실태조사 결과 운교리와의 거리가 1Km 이상 떨어져 있으며, 향교2리와의 거리가 200m에 불과하므로 담양군 조례를 개정, 2000년 3월 27일 향교3리로 하였다.

만성리(萬成里, 2개로 분구)

지세적으로 추월산의 정기가 뻗어 만사가 성숙한다하여 만성리라 이름하였고, 와우동 또는 완동으로 불렀고 만성2리는 벌을 많이 기른다 하여 벌뫼라 불었다.

양각리(羊角里, 2개로 분구)

술매,시산마을로 불렀고, 양각산 남쪽을 새터라 하였으며,서편의 마을을 사미정 또는 재미장이라 불러오고 있다.

강쟁리(江爭里, 3개로 분구)

강이 흐른다 하여 물강(江), 물줄기가 서로 합류되어서 싸우는 듯 하다하여 다툴쟁(爭)을 따서 江爭里라 하였다.
강쟁3리는 기존 강쟁3리 신성마을과 반룡1리에 속해 있는 마두마을이 편입된 것이며, 두곡마을과 3개마을이 있다. 신성마을을 일명 창고등이라고도 불렀다.

반룡리(盤龍里, 3개로 분구)

1680년경 창촌되어 반룡리라 칭하였으며, 반룡1리에 담양공고 개교와 함께 인근주변 주택 신축 등으로 세대수가 증가하여 분구의 필요성이 요구되어 반룡1리의 새터마을인 마두마을을 강쟁3리로 편입하였다. 반룡2리에는 조그만 동산이 있는데 이 동산이 용의 구슬(珠)과 같다하여 용주마을이라 불리우며, 반룡3리는 600년 전부터 구터로 불리워 오다가 신촌으로 개칭되었다.

오계리(五桂里, 3개로 분구)

1600년경 개촌되어 오현동이라 하였는데 마을뒷산인 남산을 옥녀봉 또는 옥녀탄금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거문고줄에 비유하여 명명하였으며 그후 오계리라 개칭 하였고, 계동마을은 마을 좌우후편에 계양산이 감싸고 있다하여 계동(桂洞)이라 하였다. 매화아파트를 오계 3리로 분구 2005.1.1일 담양군조례1774호로 개정

학동리(鶴洞里, 2개로 분구)

약 1000년경 성촌되어 단산리로 불러오다가 학동으로 개정되었으며 양곡마을과 법정리를 이루고 있다.

금월리(錦月里, 2개로 분구)

500여 전부터 계실 마을로 불러오다가 연화촌(蓮花村)으로 개정하였으며 금월마을은 좌측에 금강수(錦江水)란 못이 있고 뒷산은 반월형으로 되어 있어 금과 월을 따서 금월이라 칭하였다 한다.

삼만리(三萬里, 3개로 분구)

1300년경 창촌되어 삼무마을로 불러오다가 그후 삼만마을로 되었고 오정마을은 마을중앙에 정자를 짓고 오정이라하였으며, 선계마을은 1000년경 형성되었으며, 내동마을은 고대실로 불리워오다 조선말엽부터 내동마을로 불러오고 있다.

운교리(雲橋里)

장월리 또는 구름다리로 불러오다가 조선말엽부터 운교리라 개칭하였다.

삼다리(三茶里, 2개로 분구)

약 500여년 전부터 다전리(茶田里)라 불러오다가 동다(東茶), 서다(西茶), 외다(外茶) 등 3개마을을 총합하여 삼다리라 개칭하였으며 다시 내다마을과 외다마을로 구분되었다.

가산리(佳山里, 2개로 분구)

가산(佳山)마을과 회룡(會龍)마을로 나누어져 있으며 가산마을은 약 500년전 내동으로 불리워오다 조선성종때 고가매라 개칭하였다 하며, 회룡마을은 용마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생말로 불러오다 조선 말엽 용들이 몰려있는 지형이라하여 회룡이라 바꾸어 부르고 있다.
<군지 및 자료제공자 : 담양향토문화연구회, 정보출저 : 옛땅 옛터 옛이름, 저작권자 : 이해섭>
담양읍 메뉴 QR코드, URL : http://www.damyang.go.kr/index.damyang?menuCd=DOM_00000010600100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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