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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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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안리 봉안촌(鳳安村)·술지(述只)마을

백제시대 초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며 당시에는 술기동,부안동,기동,수문동,산태동으로 분산되었던 마을이 합해진후 삼국시대에 술지리로 불리웠다. 조선영조 34년(서기 1758년)에는 담양부 무이동면에 속해 있었다. 한편, 이 마을에는 고대 역사연구에 귀중한 석탑,입석,평면식 고인돌 등이 산재 되어 있으며. 1918년 무면과 정면을 합하여 무정면이 될 때 봉안리 봉안촌 술지 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봉안리 수문(守門)마을

조선 정조 24년(서기 18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당시 담양부 무이동면에 속해 있었으며 수문동이라 불렀다.

오룡리 외당(外堂)마을

조선 중종 7년(서기 1532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 형성 당시에는 찰박동이라 불리웠으나 조선시대 중엽 안쪽에 먼저 형성되어 있는 마을과 함께 오룡리라 불리웠다. 후일 안쪽마을과 구분키 위해 바깥쪽에 위치 했다 하여 외당마을이라 불렀다.

오룡리 내당(內堂)마을

후삼국시대(서기 900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뒤편에 있는 다석 산마루가 마치 다섯 마리 용이 감싸고 있는 형태라 하여 오룡동이라 불리웠다. 조선시대 중엽 바깥쪽에 있는 마을과 구분키 위해 내당이라 불렀다.

오봉리 오봉(五峰)마을

고종 성종 15년(서기 995년)경에 담주군의 소재지가 이곳에 있었던 같은 흔적(성터와 주춧돌)이 있으며 조선시대 순조때(서기 1800년대 초반)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 뒷산 다섯봉우리를 뜻하여 오봉이라 불렀다.

영천리 죽산(竹山)마을

삼국시대(서기 658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뒷산 이름을 따 영천리라 불리웠으며 영천산 아래에 대가 많아 죽산이라 불렀다.

영천리 봉서(鳳棲)마을

조선 인조 20년(서기 1642년)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형성 당시 새로 닦은터라 하여 샛터라 불리웠다. 일제시대에 풍수리지상봉의 보금자리 형태라하여 봉서리로 불렀다.

성도리 도동(道洞)·서정(西亭)마을

조선 영조 8년(서기 1732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형성 당시 도동마을이라 불리웠다. 후에 도동 서편마을은 정자가 있어 서정이라 불리웠고,도동마을과 서정마을의 중간에 있는 마을은 중간에 있다 하여 중리로 불리웠다.

성도리 성덕(成德)마을

백제 무왕때 (서기 6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뒤에 있는 영천산이 장군혈이라 여겨 장군이 되려면 덕을 쌓아야 한다하여 성덕이라 불렀다.

동산리 칠전(漆田)마을

조선 성종때(서기 1475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마을 주위에 옻나무가 많아서 옻나무골 또는 옻밭이라 불리우다 칠전으로 바꾸어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무면 동산리에 속하였으며 1918년 무정면 동산리 칠전마을이 되었다.

동산리 칠치(漆峙)마을

조선 정조(서기 17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마을뒤에 옻나무가 많아서 옻나무골 또는 옻재로 부르다가 칠치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무정면 동산리 칠치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동산리 동산(東山)마을

조선 선조 25년(서기 1592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금산 아래에 자리 잡았다하여 마을 서편에 있는 주민들로부터 동산마을이라 불리워졌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동산리에 속하게 되었다.

안평리 신안(新安)·평장동(平章洞)마을
조선 세종 17년(서기 1435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신안마을은 신안주씨가 살고 있어서 신안동이라 불리웠고 평장동마을은 마을이 평평하고 길게 형성됨에 따라 평장동이라 불리웠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안평리로 개칭하였다.

덕곡리 덕곡(德谷)마을

통일신라 선덕왕(서기 7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소씨가 사는 마을이라 하여 소촌이라 불리웠다. 통일신라 헌강왕때 덕곡으로 고쳐 불렀다고 전해온다.

서흥리 독곡(獨谷)마을

8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인근 취락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하여 독동(獨洞) 또는 독곡(獨谷)이라 불리웠으며 조선시대에 마을의 길조를 빌기 위해 서흥리로 마을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서흥리 자동(子洞)마을

100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족자동(族子洞)으로 불리웠다. 1961년 담양군조례에 의거 서흥리 2구 자동마을로 개칭하였다.

정석리 정석(貞石)마을

10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며, 집이 있는 고개라 하여 당재 또는 당현마을로 불리웠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마을의 동서남북에 큰 바위가 둘씩 문과 같이 서 있음을 유래로 정석리로 개칭하였다.

평지리 평지(平地)·고정(高亭)마을

조선 선조때(서기 1592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평지마을은 당시 마을주변에 푸른 돌이 많으므로 청석이라 이름 하였다가 조선시대 마을지형이 평평하다하여 펑지리로 개칭하였고,고정마을은 높은데 위치했다 하여 높은쟁이라 부르다가 고정마을로 개칭하였다.

동강리 강정자(江亭子)마을

조선 연종때(서기 169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앞에 오례 강이 흐르고 있어 동강리로 불리웠다. 후일 마을에 정자가 세워짐에 따라 오례강과 정자를 본따 강정자라 부르게 되었다.

동강리 동고지(東古支)마을

신라시대(서기 7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고,연유를 알수 없으나 동고지로 불리워 왔다.

오례리 오례(五禮)마을

신라 선덕왕때(서기 7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후일 이 마을에 행차한 원님이 인간이 지켜야 할 다섯가지 예를 강론하였다 하여 오례 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오례리 등룡(登龍)마을

고려 명종때(서기 11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고,풍수지리상 용리 하늘에 오르는 지형에 마을이 위치했다하여 등룡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오레리 신촌(新村)·회룡(會龍)마을

조선 정조때(서기 17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고,마을앞 오례강이 용이 꼬리를 치고 도는 형국이라 하여 회룡이라 하였다 하며,당초에는 오례마을에 속하였는데 6.25 동란 후 피난민들이 개척한 신촌마을과 함께 1970년 담양군 조례에 의해 오례 3구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군지 및 자료제공자 : 담양향토문화연구회, 정보출저 : 옛땅 옛터 옛이름, 저작권자 : 이해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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