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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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대나무박물관
전국 유일의 죽제품 주산지로서 보존, 전시, 시연, 판매 등 종합기능을 수행할 공간을 갖추어 대나무공예문화 전통 계승과 대나무공예 진흥의 계기를 마련하며, 도시 근교의 이점을 살린 관광 자원을 조성해가고 있습니다.
조성 목적(造成目的)
전국 유일의 죽제품 주산지로서 보존, 전시, 시연, 판매 등 종합기능을 수행할 공간을 갖추어 대나무공예문화 전통 계승과 대나무공예 진흥의 계기를 마련하며, 도시 근교의 이점을 살린 관광 자원 조성
사업 개요(事業槪要)
- 위 치 : 담양군 담양읍 죽향문화로 35
- 사업 기간 : 1992년부터 1997년까지(6개년)
- 사업비 : 6,159백만원(교부세1,300 도비1,550 군비3,309)
- 규 모 : 부지 46.650㎡ , 건물 3,625㎡
조성 경위(造成經緯)
- 1992. 10 : 조성 계획 수립
- 1993. 3 : 부지 매입 완료
- 1993. 11 : 설계 완료
- 1994. 1 : 부지 조성 및 시설 공사 발주
- 1997. 12 : 준 공
- 1998. 1 : 관리사무소 개소
- 1998. 2 : 죽물박물관 이전 (구박물관 - 담양읍 중앙로)
- 1998. 3.12 : 개 관
- 2003. 3 : 한국 대나무 박물관으로 명칭 변경
주요 시설(主要施設)
- 대나무박물관 1,726㎡(8개 전시실)
- 외국전시실
- 판매장 3동 1,150㎡(죽제품, 기념품, 죽순요리 전문식당, 커피전문점)
- 죽종장 3,960㎡(147종)
- 주차장 4,489㎡(150대)
한국대나무박물관 전시관
- 국산죽제품, 외국제품 합계 총 1,800여점
앞으로의 계획(向後計劃)
- 다양한 행사공간으로 활용, 시설확충 등 쾌적한 관광여건 조성
발전 방향(發展方向)
- 대나무골 담양을 상징하는 지역 명소
- 주변 관광지와 연계한 휴식공간 ( 죽녹원, 백양사, 내장사, 추월산, 담양호, 광주호, 가사문화권)
이용안내
- 관람시간 매일 : 09:00 - 18:00
관람료
한국대나무박물관 관람료
요금정보 구분, 개인, 단체, 비고 구 분 개 인 단 체 할 인 개 인 단 체 어 른 2,000 1,600 1,400 1,100 청소년/군경 1,000 700 700 500 어린이 700 500 500 300 ※ 할인은 관내 군립 유료관광지 당일 입장권 소지자에 한하여 적용
- 고속버스 첫차8:10,11:10,14:10,17:10 4회
- 항공편 서울~광주(첫비행기 8:50)
- 기차 서울~광주(첫차6:30)
전시실소개
1 전시실
- 대나무 생태 : 유리부스 바닥에 대나무생태 디오라마
- 죽대나무 : 대나무의 정의 및 특성
- 세계 대나무분포
- 한국 대나무분포
- 대나무 종류 : 담양에 자생하는 대표 대나무 종류 전시
- 대나무 생장 : 대나무 뿌리와 줄기 단면
2 전시실
- 대나무 재배 : 죽근, 모근, 묘근 등 대나무 재배 방법 및 대나무 채취에 사용하는 도구와 대나무공예품 제작 시 사용하는 도구
- 대나무공예 제작 : 주요 엮기의 종류 및 대나무를 이용한 놀이기구
- 대나무공예 제작 디오라마 : 담양의 전통가옥을 배경으로 밀랍인형을 통해 대나무공예 제작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연출
- 대나무공예 후계인 양성 영상
- 생활과 대나무 : 조선, 근대, 현대 시대에 사용한 죽제품 소개
3 전시실
- 대나무생활공예품 : 죽제품경진대회에 수상한 생활공예품 소개
- 무형문화재 제작 공예품
4 전시실
- 죽물시장 미니어처 : 60~80년대를 배경으로 죽물시장의 모습을 미니어처로 재현
- 대숲소리홍보 : 담양의 대숲소리 제품 전시
5 전시실
- 약용의 대나무 : 약용재로 쓰이는 대나무 소개
- 대나무 건강학 : 동의보감에 소개된 대나무 한방 치료법 소개
- 대나무 음식 대백과 : 죽순을 이용한 대나무 건강식 소개
체험 및 교육관
- 대나무 성장에서부터 대나무 쓰임새, 활용 등을 소개하고 대나무 악기, 대나무 퍼즐 등을 전시한 공간이다. 가족, 연인 등이 사진도 촬영할 수 있도록 포토존 설치와 담양군 관광안내 소개
영상홍보관
- 관람객들에게 담양군 홍보물 상영과 대나무 관련 각종 세미나를 개최할 수 있으며 관광공예품 개발 상품 전시대
대나무산업관
- 대나무산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실로 대잎차, 죽초액, 대잎술, 대나무 숯, 대나무인테리어 용품 등 대나무를 이용한 제품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대나무 조형물 설치
명인관 및 외국관
명인관
- 무형문화재 작품과 담양군 지정 명인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에서 생산되는 대나무공예품과 중국 절강성 안길현관을 설치하여 중국 대나무공예품을 소개
외국전시실
- 중국, 일본, 대만 등 총 13개국의 외국제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중국 안길현관을 별도 설치 관광객들에게 보다 다양한 제품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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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영정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특이한 것은 한쪽 귀퉁이로 방을 몰아붙이고 전면과 측면을 마루로 두고 있다. 명종 15년(1560)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1525-1597)이 창건하여 장인(丈人)인 석천 임억령(石川 林憶齡, 1496-1568)에게 증여한 것이다. 식영정 바로 곁에 본인의 호를 서하당(棲霞堂)이란 또 다른 정자를 지었다고 하며 최근 복원하였다.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행장(行狀)을 보면「庚申公三十六歲 築棲霞堂于昌平之星山 爲終老計……」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하당과 식영정이 1560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제봉 고경명(齊峰 高敬命, 1533-1592),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등과 함께 ’식영정 사선(息影亭 四仙)’으로 부르기도 한다. 서하당 김성원은 송강의 처외재당숙으로 송강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송강이 성산에 와 있을 때 같이 환벽당(環壁堂)에서 공부하던 동문이었다. 송강 정철은 이곳 식영정과 환벽당, 송강정(松江亭) 등 성산 일대의 미려한 자연경관을 벗삼으며『성산별곡』을 창작해냈던 것이다. 또한, 송강은 이곳을 무대로 하여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 하서 김인후(河西 金仁厚),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承) 등 당대의 명유들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玉峰 百光勳), 귀봉 송익필(歸峰 宋翼弼) 등과 교우하면서 시문을 익혔다. 이곳은 식영정 외에도 풍광이 수려하여 유상지(遊賞地)로도 이름난 곳이 많은데 자미탄(紫薇灘), 노자암, 방초주(芳草州), 조대(釣臺), 부용당(芙蓉堂), 서석대(瑞石臺) 등이 있었으나 광주호가 생기면서 일부는 물에 잠기고 현재는 부용당만이 최근 새로 지었다. 식영정 옆에는 1973년 송강집(松江集)의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장서각(藏書閣)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에는 부속건물로 부용당, 성산별곡(星山別曲) 시비(詩碑)가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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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벽당
1972년 1월 29일 광주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광주광역시 북구 광주호 상류 창계천가의 충효동 쪽 언덕 위에 있는 정자로,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낸 김윤제(金允悌 : 1501∼1572)가 낙향하여 창건하고 육영(育英)에 힘쓰던 곳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목조와가(木造瓦家)이며, 당호는 신잠(申潛)이 지었다.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 있고, 임억령(林億齡)·조자이(趙子以)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김윤제는 광주광역시 충효리 태생으로, 호는 사촌(沙村)이다. 1528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그 후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관직을 떠나고 고향으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을 썼다.
그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철(鄭徹)과 김성원(金成遠)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과 김덕보 형제는 그의 종손으로 역시 김윤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정철은 16세 때부터 27세에 관계에 나갈 때까지 환벽당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는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처음 만난 사연이 전하는 곳이다.
조부의 묘가 있는 고향 담양에 내려와 살고 있던 당시 14살의 정철이 순천에 사는 형을 만나려고 길을 가던 도중에 환벽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 때마침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에 창계천의 용소에서 용 한 마리가 노는 것을 보았다. 꿈을 깨고서 용소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비범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소년을 데려다가 여러 가지 문답을 하는 사이에 그의 영특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순천에 가는 것을 만류하고 슬하에 두어 학문을 닦게 하였다.
정철은 이곳에서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등 명현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웠다. 후에 김윤제는 그를 외손녀와 혼인을 하게 하고 그가 27세로 관계에 진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환벽당 인근에 취가정, 독수정, 소쇄원이 있다.
환벽당은 정철의 4대손 정수환(鄭守環)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여 현재 연일 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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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화경
본 정원은 한국 정원 문화의 발전을 위해 조성, 연출한 것입니다.
나무는 누구나 심고 가꿀 수 있지만, 전체적인 환경과 지상의 조화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비록 현재는 꽃과 나무의 유무에 많은 판단을 하지만, 이제는 그런 정원 감상은 서서히 탈피해 나가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죽화경은 대나무의 고장 담양의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대나무를 소재로 선택하였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변하지 않는 대나무의 곧은 강직함과 부드럽고 아름다운 꽃의 변화를 조화롭게 연출하였습니다.
수많은 정원의 형태가 있고 나름대로의 시각이 있겠지만 정원박람회를 앞둔 시점에서 이제는 우리도 정원의 심미안을 가질 때가 되었습니다.
죽화경은 전체적인 조화와 구성,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측면에서 감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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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미술관
대담미술관은 ‘함께 느껴요 Eco Life’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바탕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문화를 즐기는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문화적 혜택에 소외받은 지역작가들에게 국제무대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지역의 특색을 띤 독자성 있는 작가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고 있으며, 앞으로 국제현대미술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국제적인 전시를 기획하고 국제교류에 힘쓸 계획이다.
’세계를 담양으로...담양은 세계로’의 미술관 운영 설립정신에 맞춰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임을 알릴 수 있도록 지역주민들에게 문화 향유의 혜택을 누리는 데에 일조하고 있으며, 자연, 사람, 문화, 예술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예술적 감동과 문화적 공간이 피어나는 담양을 대표하는 명소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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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 아트센터
갤러리와 카페를 갖춘 복합문화공간 「아트센터 대담」은 ‘대나무와 담양’, ‘대범함’, ‘대화와 담소‘, ’세계속의 큰 담양‘ 등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담양의 대표명소 죽녹원과 관어(觀魚)공원 사이에 자리하고, 앞으로는 맑은 관방천이 흐른다.
「아트센터 대담」은 ‘함께 느껴요 Eco Life’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바탕으로 국제현대미술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전시회를 통해 지역주민과 관광객에게 국제수준의 관람기회를 부여하고, 상대적으로 발표기회가 적은 지역작가들의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작가와의 대화, 미술, 문학, 음악 등 세미나 발표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관광객들의 능동적 참여를 위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지역 특성을 형상화한 아트 상품을 개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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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뫼미술관
전남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 용운마을에 위치한 달뫼미술관은 전형적인 도시근교의 농촌지역으로 광주광역시의 남동쪽 지척에 있으며, 창평면 소재지를 감싸고 있는 산울타리의 주봉인 월봉산을 한글로 풀이하여 <달뫼미술관>이라 명명하였습니다.
마을의 창고를 개조하여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한 곳
지역에서 활동 중인 작가들의 작품전시는 물론 ‘젊은 리얼리스트 5인전’ 등과 같은 사실주의 작품 전시회를 열기도 하고 창평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전을 개최하여 지역 아이들의 작품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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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옥헌
오희도(吳希道, 1583-1623). 자(字)는 득원(得原), 호(號)는 명곡(明谷)
160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3년(인조 1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합격하였다. 예문관(藝文館)의 관원으로 천거되었고, 기주관(記注官)을 대신하여 어전에서 사실을 기록하는 검열(檢閱)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망하였다.
오희도(吳希道)의 넷째아들 오이정(吳以井, 1619-1655)이 자연경관이 좋은 도장곡(道藏谷)에 헌(軒)을 짓고 이를 명옥헌(鳴玉軒)이라 이름 지었다. 오이정은 스스로 호(號를) 장계(藏溪)라 한바 장계정(藏溪亭)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나 정자가 퇴락함에 따라 후손 오대경(吳大經)이 다시 중수하였다.
명옥헌(鳴玉軒)은 정자 앞에 연못이 파여 있고 둘레에 적송(赤松) 및 자미나무 등이 심어져 뛰어난 조경으로 알려졌으며, 장계정(藏溪亭)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또는 뒤편에 도장사(道藏祠)라는 사당에 있으므로, 도장정(道藏亭)이라고도 부른다.
명옥헌원림은 주변의 자연경관을 차경(借景)으로 도입한 정사(亭舍)중심의 자연순응적인 전통정원양식이지만 전(前)과 후(後)의 조선시대 전통적인 ’방지중도형(方池中島形)’의 지당부(池塘部)를 도입하였다. 전(前)의 지당부는 명옥헌의 북쪽에 위치하며 그 고저차는 약 6.3m이다. 동서너비 약 20m, 남북길이 약 40m 크기를 갖는 방지의 중심부는 원형의 섬이 있으며 주위에 약 20주의 자미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수령은 100여 년 정도이다. 명옥헌의 동쪽에 자리 잡은 지당(池塘)은 동서 16m, 남북 11m 크기이다. 이 지당은 1979년 여름에 조사 발굴된 것으로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계류의 물을 끌어 채운 것으로 북과 서쪽에 자미나무가 심어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정자로 실의 구성은 외부로 툇간을 돌리고 그 중앙에 실을 둔 중앙실형(中央室形)이다. 방에는 구들을 두었고 평천장을 하였다. 마루의 외곽에는 평난간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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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강정
송강 정철은 선조 17년(1584)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동인들이 합세하여 서인을 공박함이 치열해지자 마침내 양사(兩司)로부터 논척(論斥)을 받아 다음해 조정을 물러나자 이곳 창평으로 돌아와 4년 동안을 평범한 인간으로서 또한 시인으로서 조용한 은거생활을 했다. 여기서 그는 사미인곡을 썼던 것이다.
『송강별집(松江別集)』권7 기옹소록에「前後思美人曲 在此鄕(昌平) 時所作不記某年 似是丁亥戊子年間耳」라는 기록을 보면 양사미인곡(兩思美人曲) 제작은 창평으로 돌아온 해로부터 2∼3년 뒤가 된다 『사미인곡』은 제명(題名) 그대로 연군지정(戀君之精)을 읊은 노래이다. 그 수법은 한 여인이 남편을 이별하고 사모하는 정을 기탁해서 읊은 것인데 송강 자신의 충정을 표현한 노래라 하겠다. 심각한 실의에 빠져 있었던 때이라 송강은 이때 세상을 비관했고 음주와 영탄으로 이곳에서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골기와 팔작지붕 건물이다. 중재실(中齋室)이 있는 구조이며 정면엔 송강정(松江亭) 측면엔 ’죽록정(竹綠亭)’이란 현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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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앙정
면앙정 송순(宋純)(1493-1583)의 자(字)는 수초(守初), 호(號)는 기촌(企村), 면앙정으로 성종 24년(1493) 담양군 봉산에서 출생하였다. 중종 14년(1519)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이후 명종 2년(1547) 봉문사(奉聞使)로 북경에 다녀왔으며 이후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1550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었다. 1569년(선조 2년) 대사헌(大司憲),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으며, 의정부 우참찬(議政府 右參贊) 겸 춘추관사(春秋館使)를 지내다 사임하였다(77세).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내려와 면앙정을 짓고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비롯하여 강호제현(江湖諸賢)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양성하여 문인들이 신평선생(新平先生)이라 불렀다. 그의 정계생활은 그의 군자다운 인품과 고매하고 원만한 대인관계 때문에 순탄하였다.
면앙정 송순은 후에 명유(名儒)가 된 제봉 고경명(齊峰 高敬命),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백호 임제(白湖 林悌), 송강 정철(松江 鄭澈) 등이 그에게서 사사했다. 그의 문학작품을 보면 가사(歌辭)인 『면앙정가』를 비롯하여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 1편, 잡가(雜歌) 2편, 『면앙정단가』 등과 『오륜가(五倫歌)』 5편 등이 그의 문집에 기록되어 있다.
면앙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전면과 좌우에 마루를 두고 중앙에는 방을 배치하였다. 1979년 지붕번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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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로시티삼지내마을
슬로시티란 인구 1만 4,000명인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그레베에서 1999년 여름 당시 시장으로 재직중이던 파울로 사투르니니씨가 마을 사람들과 세계를 향해 "느리게 살자"고 호소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사투르니니 전 시장은 패스트푸드에서 벗어나 지역 요리의 맛과 향을 재발견하고 생산성 지상주의와 환경을 위협하는 바쁜 생활태도를 몰아내자고 강조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처음엔 주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그는 "슬로"라는 것이 불편함이 아닌 자연에 대한 인간의 기다림이란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슬로시티의 시작은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슬로시티는 "먹을거리야말로 인간 삶의 총체적 부분" 이라는 판단에서 지역사회의 정체성을 찾고 도시의 문화를 바꾸자는 운동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현재 슬로시티는 전세계 101개 도시가 동참하고 있으며 2007. 12. 1일 아시아 최초로 담양군 창평면 삼지천 마을이 지정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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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나무골 테마공원
울창한 대나무숲에 삼면이 둘러싸여 있는 대나무골 테마공원은 대나무숲길, 소나무숲길, 잔디운동장, 대나무갤러리, 전설의 고향 세트장, 바람개비언덕, 정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 청풍명월, 드라마 각시탈, 여름향기, 전설의 고향 등 그 외 많은 영화와 CF촬영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 시설현황
ㆍ위치 : 담양군 금성면 비내동길 148
ㆍ규모 : 부지 99,173㎡, 건축면적 330㎡
ㆍ수용인원 : 150명
ㆍ주요시설 : 야영시설 / 집회시설 / 샤워장
ㆍ편의시설 : 운동장 및 체육시설 / 수련시설
ㆍ부대시설 : 야외취사장 / 캠프파이어장 / 야외갤러리 / 야외TV-비디오관
ㆍ홈페이지 : http://www.bamboopark.co.kr
* 이용예약 : 연중 ☎ (061) 383-9291
- 입장료 : 어른 2,0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 단체 30명 이상 10% 할인 적용
- 야영장 1박2일(50명 기준) : 일 반 300,000원, 학 생 : 25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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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가사문학관
전라남도 북쪽에 위치한 담양은 기름진 평야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수많은 문화유산을 보존·전승해 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대쪽같이 올곧은 선비정신을 이어받은 조선시대 사림(士林)들은 불합리하고 모순된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큰 뜻을 이룰 수 없음을 한탄하며 낙남(落南)하여, 이곳 담양 일원에 누(樓)와 정자(亭子)를 짓고 빼어난 자연경관을 벗 삼아 시문을 지어 노래하였다.
이들은 수신과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나라의 부름을 받아서는 충성하고, 국난이 있을 때에는 분연히 일어나 구국에도 앞장섰다.
조선시대 한문이 주류를 이루던 때에 국문으로 시를 제작하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사문학이 크게 발전하여 꽃을 피웠다. 이서의 낙지가,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정식의 축산별곡, 남극엽의 향음주례가·충효가, 유도관의 경술가·사미인곡, 남석하의 백발가·초당춘수곡·사친곡·원유가, 정해정의 석촌별곡·민농가 및 작자미상의 효자가 등 18편의 가사가 전승되고 있어 담양을 가사문학의 산실이라고 부른다.
담양군에서는 이러한 가사문학 관련 문화유산의 전승·보전과 현대적 계승·발전을 위해 1995년부터 가사문학관 건립을 추진하여 2000년 10월에 완공하였다.
본관과 부속건물인 자미정·세심정·산방·토산품점·전통찻집 등이 있다. 전시품으로는 가사문학 자료를 비롯하여 송순의 면앙집(傘仰集)과 정철의 송강집(松江集) 및 친필 유묵 등 귀중한 유물이 있다. 문학관 가까이에 있는 식영정·환벽당·소쇄원·송강정·면앙정 등은 호남시단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으며, 이는 한국 가사문학 창작의 밑바탕이 되어 면면히 그 전통을 오늘에 있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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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양호
용추봉과 추월산 사이에서 흐르는 물이 바로 아래 담양호를 이룬다. 76년 9월에 축조된 호수로써 제방길이 316m, 높이 46m, 만수면적 405ha에 저수량 6,670만톤이 담양평야 4,245ha의 농토를 적셔주는 농업용수원으로 영산강의 시원(용소)이기도 하다.
담양호를 중심으로 추월산 국민관광단지와 가마골 청소년야영장, 금성산성 등이 감싸고 있어 담양 제1의 관광지이다. 또한 산허리를 뚫은 터널을 통하는 신간호반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도 각광받고 있어 주변 모두가 도시민의 쉼터로 사랑받고 있다. 담양댐 근처에는 애틋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고구마 모양의 애기바위가 있다. 옛날 금성면에 6대 독자를 둔 금부자 부부가 살았는데 후손을 많이 보는 것이 소원이어서 1년사이에 며느리를 여섯명이나 갈아 들였다. 그런데 여섯 며느리가 모두 말이 많아 그 때문에 삼신을 쫓아 애를 못낳는다는 신령의 말을 듣고 일곱번째 며느리에게는 말조심을 시켰는데 과연 1년 안에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게 되었다. 이즈음 새며느리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날이 밝거든 자기를 찾아오되 신령인 자기를 만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입을 열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다. 다음날 며느리는 산신제당이 있는 철마단을 찾아 나섰는데 산등성이에 이르렀을 때 집채만한 바위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만 "워메? 바우가 걸어 온다냐"고 말하고 말았다. 순간 바위는 걸음을 멈추며 며느리를 깔고 앉아버렸다. 그 뒤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애기바위"라 불리게 되었고, 이 지역 여자들은 말조심하며 살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수박향의 빙어
금성산 자락을 휘감은 담양호의 맑고 시원한 물에서 서식하는 빙어는 전국의 어느 빙어와도 비교할 수 없는 상큼한 맛을 자랑한다. 겨우내 묵은 음식에 물릴 미식가들에게 상큼한 입맛을 되살려 주는 빙어는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산란 후 물위에서 모습을 감추는 겨울 손님이다. 보통 12월부터 4월 초순이 빙어맛이 최고인데 한겨울 눈덮인 담양호에 얼음구멍을 파고 낚시를 해 고추장에 찍어먹는 맛과 빙어튀김의 바삭바삭 한 맛은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일품이다.
바라보고 있으면 시원스레 가슴을 씻어내리는 담양호로 가자. 구경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담양호와 담양호를 둘러싼 아름다운 수채화 안에서 지금 가족과, 친구와, 연인과 함께 즐거운 추억거리를 만들어 보자.
관리청 : 영산강 농지 개량조합 ☎(061) 381-2122∼3
* 사진촬영 포인트 도림리, 용연리(가마골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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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마골 생태공원
1. 가마골 소개
담양군 용면 용연리 소재 용추산(해발 523m)을 중심으로 사방 4km 주변을 가마골이라고 부르는데, 여러개의 깊은 계곡과 폭포, 기암괴석이 수려한 경관을 이루고 있어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영산강의 시원으로 유명한 용소가 있고 1986년부터 관광지로 지정, 개발되어 관광객을 위한 각종 볼거리, 편의시설, 운동시설, 등산로 등이 잘 갖추어져 있다.
2. 가마골 전설
옛날 담양 고을에 어떤 부사가 부임하였다. 그는 풍류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가마골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고 하여 이곳 경치를 구경하고자 관속들에게 예고령을 내리고 그날 밤 잠을 자는데 꿈에 백발선인이 나타나 내일은 내가 승천하는 날이니 오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사라졌다. 그러나 부사는 신령의 말을 저버리고 이튿날 예정대로 가마골로 행차했다. 어느 못에 이르러 그 비경에 감탄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못의 물이 부글부글 소용돌이치고 주위에는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황룡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러나 황룡은 다 오르지 못하고 그 부근 계곡으로 떨어져 피를 토하며 죽었다. 이를 본 부사도 기절하여 회생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 사람들은 용이 솟은 못을 "용소"라고 하고 용이 피를 토하고 죽은 계곡을 "피잿골", 그리고 그 일대 계곡을 그릇을 굽는 가마터가 많다고 하여 "가마곡"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가마곡"이 "가마골"로 변하여 불렸다고 전해온다.
3. 가마골 : 소설 ’남부군’의 현장
6.25 격전지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처참했던 곳 중 하나가 가마골이다. 1950년 가을 국군의 반격으로 후퇴하던 전남ㆍ북 주둔 북한군 유격대 패잔병들이 이곳에 집결하여 은거하면서 약 5년 동안 유격전을 펼쳤다. 당시 유격대들은 이곳 가마골에 노령지구사령부(사령관 김병억, 장성 북하면 출신)를 세우고 3개 병단이 주둔하면서 낮이면 곳곳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민가로 내려와 살인, 약탈, 방화를 일삼았고, 전투가 장기화됨에 따라 병기시설인 탄약제조창과 군사학교, 인민학교, 정치보위학교 및 정미소까지 설치해 놓고 끈질긴 저항을 계속하다가 육군 8사단, 11사단과 전남도경 합동작전에 의해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1955년 3월 완전히 섬멸되었다.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되어 그날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가끔 탄피, 수류탄, 무기 제조에 쓰인 야철, 화덕 등이 발견되어 그날의 참화를 말하여 주고 있고, 당시 사령관이 은거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사령관 계곡을 등산로를 따라가면 찾을 수 있다.
4. 신중 동국여지승람 담양도호부편에 나오는 기록
"추월산 동쪽에 두 개의 석담이 있다. 아래에 큰 바위가 있고 바위구멍으로부터 물이 흘러나와 공중에 뿌리고 이 물이 쏟아져 큰못을 이루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바위구멍은 용이 뚫은 것이라 하는데 마치 용이 지나간 자취처럼 암면이 꾸불꾸불 패여있다. 옛적에 전라도 안겸사가 이곳을 찾아와 용의 모습을 보고자 청하자 용이 머리를 내밀었다. 안겸사와 그를 따라 왔던 기관이 용의 눈빛에 놀라 죽어 용소 아래에 안겸사와 기관이 묻힌 그 무덤이 있다."
5. 용소에 나오는 소개자료
"용소"는 계곡을 따라 흐르는 시냇물이 이곳 암반으로 형성된 물목을 통과하는 동안 억만겁의 세월을 통해 암반을 깍고 깍아 마치 용이 꿈틀거리며 지나간 자국 마냥 홈을 이루었다. 이 홈이 중간에서 석질이 강한 암반에 걸려 이를 뚫지 못하자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고 분수처럼 솟구친 물이 암반 밑에 쏟아져 시퍼런 용소를 이루어 놓았다. 원시림과 계곡이 어우러져 여름에도 서늘하다. 용연 제1폭포와 용연 제2폭포를 볼 수 있어 더욱 좋다. 경사가 완만하여 삼림욕 코스로 그만이다. 바위채송화, 참나리 등 다양한 야생화가 분포해 있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용추사가 있다.
6. 옛 도공의 애환이 서린 가마터
가마골은 그릇을 굽는 가마터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98년 용추사 주변에서 임도 개발 공사를 하다가 가마터가 발견되었다.지명의 유래가 사실이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7. 기암절벽 위에 서 있는 시원정과 출렁다리
가마골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영산강의 시원인 용소를 바라보는 위치에 있어서 정자와 출렁다리의 이름이 각각 시원정과 출렁다리다. 아슬아슬한 스릴과 함께 30분 가량의 아기자기한 등산을 즐길 수 있도록 등산로가 개발되어있다.
8. 향토수목과 야생화 50,000여본이 식재된 자연학습원
야영시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소나무림과, 식생관찰지 및 야생화 단지를 조성하여 배롱나무, 산딸나무, 산수유, 대나무, 차나무 등 우리나라 고유의 향토수목 50여종과 원추리, 비비추, 맹문동 앵초 등 야생화 30 여종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이다. 잔디밭, 연못, 산책로, 쉼터도 조성되어 있다.
9. 시간대별로 다양하고 특색있는 등산로
짧게는 30분 코스에서부터 길게는 4시간 코스까지 상황과 형편에 따라 다양하게 등산을 즐길 수 있다. 가마골 최고봉인 치재산(591m)에 오르면 추월산 너머로 담양읍까지 조망할 수 있다.
* 이용안내
- 입장료
개인 : 어른 2,000원, 청소년/군인 1,000원, 어린이 700원
단체 : 어른 1,600원, 청소년/군인 700원, 어린이 500원(단체기준 : 20명이상)
- 문의처 : 가마골 생태공원관리사무소 ☎ (061) 380-2794~8
- 사진촬영 포인트 : 용소폭포 앞과 시원정, 용연 1,2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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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 담당자 :
- 관광정책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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