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10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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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흥사 계곡용흥사 계곡은 담양읍에서 북으로 8㎞쯤 가다 바심재 왼쪽으로 용흥리 마을을 지나 2㎞쯤 올라가면 용흥사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담수하는 저수지가 있으며,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용구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는 용흥사 절이 있다. 속설에 의하면 조선 영조의 어머니인 창평인 최복순 여인이 이 절에서 기도를 하여 영조를 낳고 이 절 이름을 용흥사라 하고 산 이름도 용구산에서 몽선산이라 고쳤다고 한다. 용흥사는 현 건물지의 규모로 보아 옛날에는 대규모의 사찰이었던 같으나 임진왜란과 한 말 의병전쟁, 한국전쟁 당시 모두 소실되었고 근래 대웅전과 요사채를 복원하였다.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는 용흥사 계곡은 단풍나무와 푸른 송림사이에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있고 약 2㎞에 이르는 계곡은 물이 맑고 깨끗하여 물고기가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름에는 담양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광주 등 다른 지역에서까지 많은 피서객이 몰려들어 시원한 여름을 보내기도 한다. 또한, 용흥사 계곡 사이로 붉게 물든 가을 단풍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기이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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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방제림이 숲은 푸조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음나무, 개서어나무, 곰의말채나무, 벚나무 및 은단풍 등 여러 가지 낙엽성 활엽수들로 이루어졌으며, 나무의 크기도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가 1m 정도의 것부터 5.3m에 이르는 것까지 다양하다. 나무의 수령은 최고 300년이 된다. 관방제림(官防堤林)은 조선 인조 26년(1648) 당시의 부사 성이성(府使 成以性)이 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축조하고 나무를 심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철종 5년(1854)에는 부사 황종림(府使 黃鍾林)이 다시 이 제방을 축조하면서 그 위에 숲을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처럼 예로부터 산록이나 수변 또는 평야지대에 임야구역을 설치하고 보호하여 특이한 임상을 갖춘 곳을 임수(林藪)라 한다. 임수의 종류를 나누어 보면 종교적 임수, 교육적 임수, 풍치적 임수, 보안적 임수, 농리적 임수 등 그 임상과 입지조건 또는 설치의식에 따라 구분된다. 전남에는 완도 갈지리 임수, 곡성읍 읍내리 임수, 곡성 오곡면 외천 임수, 광양 인서리 임수, 광주 경양제 임수 등 몇 군데가 있으나 그 중 가장 대표적이고 그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는 곳이 담양 관방제 임수이다. 2004년에는 산림청이 생명의숲가꾸기국민운동, (주)유한킴벌리 등과 공동 주최한 ‘제5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했다. *주소 - 전남 담양군 담양읍 죽녹원로 98 (관방제림입구) - 전남 담양군 담양읍 객사7길 37(관방제림옆 총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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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마골용소가마골 소개 : 담양군 용면 용연리 소재 용추산(해발 523m)을 중심으로 사방 4km 주변을 가마골이라고 부르는데, 여러개의 깊은 계곡과 폭포, 기암괴석이 수려한 경관을 이루고 있어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영산강의 시원으로 유명한 용소가 있고 1986년부터 관광지로 지정, 개발되어 관광객을 위한 각종 볼거리, 편의시설, 운동시설, 등산로 등이 잘 갖추어져 있다. 가마골 전설 : 옛날 담양 고을에 어떤 부사가 부임하였다. 그는 풍류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가마골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고 하여 이곳 경치를 구경하고자 관속들에게 예고령을 내리고 그날 밤 잠을 자는데 꿈에 백발선인이 나타나 내일은 내가 승천하는 날이니 오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사라졌다. 그러나 부사는 신령의 말을 저버리고 이튿날 예정대로 가마골로 행차했다. 어느 못에 이르러 그 비경에 감탄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못의 물이 부글부글 소용돌이치고 주위에는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황룡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러나 황룡은 다 오르지 못하고 그 부근 계곡으로 떨어져 피를 토하며 죽었다. 이를 본 부사도 기절하여 회생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 사람들은 용이 솟은 못을 "용소"라고 하고 용이 피를 토하고 죽은 계곡을 "피잿골", 그리고 그 일대 계곡을 그릇을 굽는 가마터가 많다고 하여 "가마곡"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가마곡"이 "가마골"로 변하여 불렸다고 전해온다. 가마골 : 소설 ’남부군’의 현장 6.25 격전지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처참했던 곳 중 하나가 가마골이다. 1950년 가을 국군의 반격으로 후퇴하던 전남ㆍ북 주둔 북한군 유격대 패잔병들이 이곳에 집결하여 은거하면서 약 5년 동안 유격전을 펼쳤다. 당시 유격대들은 이곳 가마골에 노령지구사령부(사령관 김병억, 장성 북하면 출신)를 세우고 3개 병단이 주둔하면서 낮이면 곳곳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민가로 내려와 살인, 약탈, 방화를 일삼았고, 전투가 장기화됨에 따라 병기시설인 탄약제조창과 군사학교, 인민학교, 정치보위학교 및 정미소까지 설치해 놓고 끈질긴 저항을 계속하다가 육군 8사단, 11사단과 전남도경 합동작전에 의해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1955년 3월 완전히 섬멸되었다.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되어 그날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가끔 탄피, 수류탄, 무기 제조에 쓰인 야철, 화덕 등이 발견되어 그날의 참화를 말하여 주고 있고, 당시 사령관이 은거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사령관 계곡을 등산로를 따라가면 찾을 수 있다. 신중 동국여지승람 담양도호부편에 나오는 기록 "추월산 동쪽에 두 개의 석담이 있다. 아래에 큰 바위가 있고 바위구멍으로부터 물이 흘러나와 공중에 뿌리고 이 물이 쏟아져 큰못을 이루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바위구멍은 용이 뚫은 것이라 하는데 마치 용이 지나간 자취처럼 암면이 꾸불꾸불 패여있다. 옛적에 전라도 안겸사가 이곳을 찾아와 용의 모습을 보고자 청하자 용이 머리를 내밀었다. 안겸사와 그를 따라 왔던 기관이 용의 눈빛에 놀라 죽어 용소 아래에 안겸사와 기관이 묻힌 그 무덤이 있다." 용소에 나오는 소개자료 "용소"는 계곡을 따라 흐르는 시냇물이 이곳 암반으로 형성된 물목을 통과하는 동안 억만겁의 세월을 통해 암반을 깍고 깍아 마치 용이 꿈틀거리며 지나간 자국 마냥 홈을 이루었다. 이 홈이 중간에서 석질이 강한 암반에 걸려 이를 뚫지 못하자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고 분수처럼 솟구친 물이 암반 밑에 쏟아져 시퍼런 용소를 이루어 놓았다. 원시림과 계곡이 어우러져 여름에도 서늘하다. 용연 제1폭포와 용연 제2폭포를 볼 수 있어 더욱 좋다. 경사가 완만하여 삼림욕 코스로 그만이다. 바위채송화, 참나리 등 다양한 야생화가 분포해 있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용추사가 있다. 옛 도공의 애환이 서린 가마터 가마골은 그릇을 굽는 가마터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98년 용추사 주변에서 임도 개발 공사를 하다가 가마터가 발견되었다.지명의 유래가 사실이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기암절벽 위에 서 있는 시원정과 출렁다리 가마골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영산강의 시원인 용소를 바라보는 위치에 있어서 정자와 출렁다리의 이름이 각각 시원정과 출렁다리다. 아슬아슬한 스릴과 함께 30분 가량의 아기자기한 등산을 즐길 수 있도록 등산로가 개발되어있다. 향토수목과 야생화 50,000여본이 식재된 자연학습원 야영시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소나무림과, 식생관찰지 및 야생화 단지를 조성하여 배롱나무, 산딸나무, 산수유, 대나무, 차나무 등 우리나라 고유의 향토수목 50여종과 원추리, 비비추, 맹문동 앵초 등 야생화 30 여종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이다. 잔디밭, 연못, 산책로, 쉼터도 조성되어 있다. 시간대별로 다양하고 특색있는 등산로 짧게는 30분 코스에서부터 길게는 4시간 코스까지 상황과 형편에 따라 다양하게 등산을 즐길 수 있다. 가마골 최고봉인 치재산(591m)에 오르면 추월산 너머로 담양읍까지 조망할 수 있다. * 가마골생태공원 금지사항 - 물놀이시설 없음 (물놀이기구 반입 금지) - 음식물 반입금지(물,도시락,김밥제외) - 애완동물 반입금지 - 취사도구 반입시 과태료 부과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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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월산담양읍에서 북쪽으로 14km쯤 가면 전남 5대 명산 중의 하나인 해발 731m의 추월산을 만나게 된다. 담양읍에서 보면 스님이 누워 있는 형상인데 각종 약초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예로부터 명산으로 불렸으며, 진귀종의 추월산 난이 자생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추월산 하부는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노송이 빽빽이 들어차 있어 여름이면 가족을 동반한 관광객들에게 더없는 휴식처가 되고 있으며, 그리 높지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오를 수 없는 산능성으로 연중 등산객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또한 경칩(2∼3월)을 전후해서 용면 분통 마을 주변에서 나는 두릅은 상큼한 향기와 특유한 맛으로 봄의 미각을 한껏 돋우어 준다. 산 중부의 울창한 숲을 지나 추월산 정상에 오르면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고 산 아래에 널찍하게 펼쳐지는 담양호와 한데 어우러져 그야말로 절경을 이룬다. 추월산과 담양호와 만나는 지점에 관광단지가 조성되어 식당과 주차장 등 편익시설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등산 소요시간 : 2 ~ 4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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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산성산성산은 용면 도림리와 금성면 금성리, 전라북도 순창군의 도계를 이루는 산으로 높이가 605m이며 담양읍에서 북동쪽으로 약 6km 떨어져 있다. 동쪽으로 마주하고 있는 광덕산을 포함한 일대의 산성산은 사방이 깎아지른 암벽과 가파른 경사로 되어 있는데 특히 주봉인 철마봉의 형세는 주위가 험준한 암석으로 둘러싸이고 중앙은 분지로 되어 있어 예로부터 요새지로 이용되어 왔다. 그 대표적인 유적이 금성산성이다. 금성산성은 고려시대에 쌓은 것으로 전해오는데 산성의 둘레가 7,345m이고 성 안에는 곡식 2만 3천 석이 해마다 비축되었다 한다. 특이한 점은 금성산성밖에는 높은 산이 없어 성문 안을 전혀 엿볼 수 없는 형세를 잘 살펴서 지은 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북의 성문과 성벽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다. 일단 산성 안으로 들어가면 아직도 곳곳에 우물이나 절구통 같은 유물들을 찾아볼 수 있으며 산성의 동문 밖은 전라북도 순창군의 강천사 등 관광명소와 바로 연결되는 길이 있어서 관광코스나 호반유원지로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사적 제353호) 금성산성 사적지 일주 등산소요시간 : 4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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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풍산담양읍에서 서북쪽으로 약 8km 지점에 있는 이 병풍산은 담양군 대전면, 수북면, 월산면 장성군 북하면에 경계를 이루고 있다. 담양군 수북면 소재지에서 병풍산을 바라보면 왜 이 산을 병풍산이라 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오른쪽 투구봉에서 시작하여 우뚝 솟은 옥녀봉, 중봉, 천자봉을 거쳐 정상인 깃대봉과 신선대까지 고르게 뻗은 산줄기는 한눈에 보아도 틀림없는 병풍이다. 병풍산은 높이가 822.2m로 노령산맥에 위치하고 있는 산중에 가장 높은 산이다. 또한, 북동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뻗은 병풍산은 등줄기 양옆으로 무수히 많은 작은 능선이 있는데 이 능선 사이에 일궈진 골짜기가 99개에 이르는데 이중 한 개 골짜기만 빼고 나머지의 골짜기는 항상 물이 흐르고 있다. 장성경계에서 깃봉까지 등산 소요시간 : 1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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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인산대전면 행성리와 수북면 오정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 564m이다. 산 북쪽에는 삼인동(三人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삼인산(三人山)은 몽선암(夢仙庵)으로 불러왔다. 지금부터 1천2백여 년 전 『견훤 난』때 피난온 여인들이 끝내는 몽선암 에서 몽골(蒙古)의 병졸들에게 붙잡히게 되자, 몽선암 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 몽골 병졸들의 만행을 죽음으로 항쟁했다는 것이다. 그 후 이성계(李成桂)가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자신(自身)의 등국(登國 = 임금의 자리에 오름)을 위해 전국의 명산(名山)을 찾아 기도하던 중 이성계(李成桂)의 꿈에 삼인산(三人山)을 찾으라는 성몽 끝에 담양의 삼인산(三人山)을 찾아 제를 올리고 기도하여 등극하게 되자 꿈에 성몽하였다 하여 몽성산(夢聖山)이라 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어 몽선산(夢仙山)이 오랜 세월 동안에 변하여 몽선산(夢聖山)이 되었다는 일설도 있어 주민들의 판단에 맡긴다. 애초 三人山의 명칭은 산의 형태가 사람人자 3자를 겹쳐 놓은 형국이라하여 三人山이라 이름하였다. 산 북쪽에 아래 있는 三人洞 마을은 1750년경(英祖) 무안(務安)에서 함양인(咸陽人) 유학자(儒學者) 박해언(朴海彦)이 풍수지리설을 따라 명당을 찾았던 곳이 삼인산(三人山이)다. 산세가 좋고 산아래는 만물이 태생하는 터가 자리 잡고 있어 정착하였다는 것이다. (또는 1800년경의 설도 있음) 三人山 아래의 중앙에 위치하여 三人洞이라고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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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타세쿼이아 길대나무숲 외에도 메타세쿼이아라는 가로수가 심어져 있어서 이국적이며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고 있다. 멀리서 보면 옹기종기 줄을 서서 모여 앉은 요정들 같기도 하고 장난감 나라의 꼬마열차 같기도 하다. 길 가운데에서 쳐다보면 영락없는 영국 근위병들이 사열하는 모습이다. 질서정연하게 사열하면서 외지인들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메타세쿼이아( M e t a s e q u o i a ) 가로수길은 1972년 담양군(제19대, 김기회 군수)에서 국도 24호선, 군청~금성면 원율삼거리 5km 구간에 5년생 1,300본을 식재하여 조성한 길이다. 당시 어려운 재정여건에도 불구하고 군비를 확보하여 나무를 심고 가꾸었으며 이후 담양읍과 각 면으로 연결되는 주요도로에 지속적으로 식재관리하여 담양의 아름다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 되었다. 이 길을 가다 보면 이국적인 풍경에 심취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도의 길목으로 빠져들고 만다. 초록빛 동굴을 통과하다 보면 이곳을 왜 ‘꿈의 드라이브코스’라 부르는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무려 8.5 k m에 이르는 국도변 양쪽에 자리 잡은 10~20m에 이르는 아름드리나무들이 저마다 짙푸른 가지를 뻗치고 있어 지나는 이들의 눈길을 묶어둔다. 이 길은 푸른 녹음이 한껏 자태를 뽐내는 여름이 드라이브하기에 가장 좋다. 잠깐 차를 세우고 걷노라면 메타세쿼이아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특유의 향기에 매료되어 꼭 삼림욕장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너무나 매혹적인 길이라 자동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쳐 버리기엔 왠지 아쉬움이 남는 길이다. 자전거를 빌려서 하이킹을 한다면 메타세쿼이아 길의 참모습을 누리기에 더없이 좋지 않을까 싶다. 오래전 고속도로 개발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이 도로가 사라질 위험에 처한 적이 있지만 많은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도로가 비켜날 만큼 세인들에게 중요한 곳으로 인식된 곳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영화 초반에 택시기사 민우(김상경)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사이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에 행복해하는 모습이 촬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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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녹원담양군에서 조성한 담양읍 향교리의 죽녹원이 죽림욕장으로 인기다. 관방제림과 영산강의 시원인 담양천을 끼는 향교를 지나면 바로 왼편에 보이는 대숲이 죽녹원이다. 죽녹원 입구에서 돌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밟고 오르며 굳어 있던 몸을 풀고 나면 대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대바람이 일상에 지쳐 있는 심신에 청량감을 불어 넣어준다. 또한, 댓잎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노라면 어느 순간 빽빽이 들어서 있는 대나무 한가운데에 서 있는 자신이 보이고 푸른 댓잎을 통과해 쏟아지는 햇살의 기운을 몸으로 받아내는 기분 또한 신선하다. 죽녹원 안에는 대나무 잎에서 떨어지는 이슬을 먹고 자란다는 죽로차(竹露茶)가 자생하고 있다. 죽로차 한 잔으로 목을 적시고 죽림욕을 즐기며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대나무를 올려다보자.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매력 또한 가지고 있는 대나무와 댓잎이 풍기는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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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쇄원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주거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후원(後園)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內堂)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되어 있다. 전원(前園)은 대봉대(待鳳臺)와 상하지(上下池), 물레방아 그리고 애양단(愛陽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원(溪園)은 오곡문(五曲門) 곁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여기에 광풍각(光風閣)을 곁들이고 있다. 광풍각의 대하(臺下)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다. 이 계류구역은 유락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내원(內園) 구역은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으로서 당(堂)과 오곡문(五曲門) 사이에는 두 계단으로 된 매대(梅臺)가 있으며 여기에는 매화, 동백, 산수유 등의 나무와 기타 꽃나무가 심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곡문(五曲門) 옆의 오암(鼇岩)은 자라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또 당 앞에는 빈 마당이 있고 광풍각 뒷편 언덕에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도오(桃塢)가 있다. 당시에 이곳에 심어진 식물은 국내 종으로 소나무, 대나무, 버들, 단풍, 등나무, 창포, 순채 등 7종이고 중국 종으로 매화, 은행, 복숭아, 오동, 벽오동, 장미, 동백, 치자, 대나무, 사계, 국화, 파초 등 13종 그리고 일본산의 철쭉, 인도산의 연꽃 등 모두 22종에 이르고 있다. 소쇄원은 1530년(중종 25년)에 양산보가 꾸민 조선시대 대표적 정원의 하나로 제월당(霽月堂), 광풍각(光風閣), 애양단(愛陽壇), 대봉대(待鳳臺) 등 10여 개의 건물로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몇 남아 있지 않았다. 제월당(霽月堂)은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을 위한 집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광풍각(光風閣)은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의 손님을 위한 사랑방으로 1614년 중수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역시 팔작지붕 한식이다. 정원의 구조는 크게 애양단(愛陽壇)을 중심으로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광풍각(光風閣)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가적(道家的)인 색채도 풍겨나와 오암(鰲岩), 도오(桃塢), 대봉대(待鳳臺) 등 여러 명칭이 보인다. 제월당에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쓴 「소쇄원사십팔영시(瀟灑園四十八詠詩)」(1548)가 게액되어 있으며, 1755년(영조 31년)에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한다. 소쇄원은 1528년 처음 기사가 나온 것으로 보아 1530년 전후에 착공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화순으로 공부하러 갈 때 소쇄원에서 꼭 쉬었다 갔다는 기록이 있고, 1528년 『소쇄정즉사(瀟灑亭卽事)』에는 간접적인 기사가 있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소쇄원제초정(瀟灑園題草亭)』에는 자기가 태어나던 해(1536)에 소쇄원이 조영된 것이라 하였다. 1542년에는 송순이 양산보의 소쇄원을 도왔다는 기록도 있다. 소쇄원은 양산보 개인이 꾸몄다기보다는 당나라 이덕유(李德裕)가 경영하던 평천장(平泉莊)과 이를 모방한 송순, 김인후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다. 1574년 고경명(高敬命)이 쓴 『유서석록(遊瑞石錄)』에는 소쇄원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이 있어 당시 소쇄원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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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 담당자 :
- 관광정책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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