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시티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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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탐방
슬로시티란 인구 1만 4,000명인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그레베에서 1999년 여름 당시 시장으로 재직중이던 파울로 사투르니니씨가 마을 사람들과 세계를 향해 "느리게 살자"고 호소한데서 비롯되었음. 사투르니니 전 시장은 패스트푸드에서 벗어나 지역 요리의 맛과 향을 재발견하고 생산성 지상주의와 환경을 위협하는 바쁜 생활태도를 몰아내자고 강조하고 나섰던 것임, 처음엔 주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그는 "슬로"라는 것이 불편함이 아닌 자연에 대한 인간의 기다림이란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음. 슬로시티의 시작은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음. 슬로시티는 "먹을거리야말로 인간 삶의 총체적 부분" 이라는 판단에서 지역사회의 정체성을 찾고 도시의 문화를 바꾸자는 운동으로 확대된 것임. 현재 슬로시티는 전세계 101개 도시가 동참하고 있으며 2007. 12. 1일 아시아 최초로 담양군 창평면 삼지천 마을이 지정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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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뫼미술관
전남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 용운마을에 위치한 달뫼미술관은 전형적인 도시근교의 농촌지역으로 광주광역시의 남동쪽 지척에 있으며, 창평면 소재지를 감싸고 있는 산울타리의 주봉인 월봉산을 한글로 풀이하여 <달뫼미술관>이라 명명하였습니다.
마을의 창고를 개조하여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한 곳
지역에서 활동 중인 작가들의 작품전시는 물론 ‘젊은 리얼리스트 5인전’ 등과 같은 사실주의 작품 전시회를 열기도 하고 창평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전을 개최하여 지역 아이들의 작품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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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한각
이 건물은 이서(李緖)의 재실(齋室)이다. 이서는 태종의 고손이며 양녕대군의 증손으로 중종 2년(1507) 이과(李顆)의 옥사(獄死)로 인하여 전라도 창평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후 14년 동안 귀양살이 끝에 풀렸으나,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 담양군 대덕면에서 일생을 마쳤다. 유배시절 그의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두현운산장, 한창세월다, 금명금야몽, 비도한강파 (斗縣雲山壯, 寒窓歲月多, 今明今夜夢, 飛渡漢江波)’ 몽한각은 양녕대군의 후손들인 당시 담양부사 이동야(李東野 : 1802. 5 ~ 1806. 12)와 창평현령 이훈휘(李薰徽 : 1803. 3 ~ 1807. 2) 등이 이 지방에서 관직을 보내면서 오랫동안 이서공(李緖公)의 재실(齋室)이 없음을 알고 순조 3년(1803)에 현재의 몽한각(夢漢閣)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건물은 남서향으로 자리 잡고 두 단의 높은 축대를 쌓고 두벌대의 기단 위에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2칸에 전후좌우(前後左右) 반퇴(半退)집으로 쪽마루를 사방에 돌린 아주 특이한 형식을 하고 있다. 1916년 중수하였고, 1979년 지붕번와 보수를 하였다. 몽한각의 건축적 특색은 양쪽 익칸(翼間)의 전면부에서 보이는 퇴칸의 처리이다. 즉 일반적으로 이러한 형식의 건물에서 보이는 외목도리가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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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현관
담양 모현관 소장 고문서는 조선시대 문관이며 학자인 선산유씨 미암 유희춘(1513~1577)의 미암일기(보물 제206호)가 소장되어 있는 모현관에 보존되어 있는 고문서와 고문헌 238점이다. 호적관련문서인 호구단자와 준호구(準戶口), 청원문서인 소지(所志), 상서(上書), 원정(原情), 등장(等狀), 매매문서[매매명문(賣買明文)], 분재문서[별급문기(別給文記)], 노비안(奴婢案), 학생안(學生案, 의암서원 외), 시권(試券), 간찰(簡札)들로 임진왜란 이전인 16세기부터 19세기 말엽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종류(선산유씨가문, 미암 유희춘, 의암서원 등)의 자료로서 제도사, 생활사, 문화사 연구에 가치가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서는 1566년[가정 45년(嘉靖 45)]에 유희춘이 종성(鍾城)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오자, 미암의 둘째 누나[吳妹]가 그동안 관리하여 오던 전답과 노비를 유희춘에게 별급(別給)하는 문서이다. 그리고 김해김씨(金海金氏)의 분급문기(1570년경, 크기 세로 350cm, 가로 52cm)와 울산김씨(蔚山金氏)의 분급문기(1583년)는 임진왜란 이전의 재산상속 관계를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김해김씨 분급문서는 김일손(金馹孫)의 증손녀가 유희춘의 손부(孫婦)로 시집오면서 부친인 김장에게서 재산을 분급받은 문서로 보인다. 울산김씨 분급 문서는 미암 유희춘의 자부(子婦)이자 하서 김인후의 딸인 울산김씨가 2남 1녀에게 재산을 분급한 문서이다. 모현관 고문서 가운데 미암 유희춘 관련자료는 유희춘이 처가(妻家)에서 분급받은 분재기(分財記), 또 유희춘이 그의 자녀들에게 분급한 분재기이다. 그리고, 유희춘 후손들의 과거 응시 답안지, 호구단자와 준호구 등 호적자료(戶籍資料), 문중 산송(山訟)과 관련된 청원서(請願書) 등이다. 그리고 유희춘을 배향한 의암서원 관련 문서들이다. 1607년에 창평에 삼천사(三川祠)를 건립하고 유희춘을 배향했는데, 1630년경 담양으로 이건하면서 백천사(白川祠)로 개칭하였다가 1669년 송준길(宋浚吉)의 상소로 사액되면서 의암서원이 되었다. 이 서원 관련 자료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는 삼천사 걸립시 작성된 <영건유사기(營建有司記)>(1607년)를 비롯하여 유생안(儒生案) * 서재안(西齋案) * 보직안(保直案)들이다. 이후 자료들은 17-18세기 선산유씨가(善山柳氏家)의 산송(山訟)과 관련된 소지(所志) * 단자(單子) * 원정(原情) 등 청원서, 문중 후손들의 호구(戶口)자료와 매매문서 등 모두 36종류에 이른다. 모현관 소장 고문서는 미암 유희춘의 생존 시기에 해당하는 명종~선조 대의 자료는 8건이고, 그 다음 유희춘의 사우가 건립된 시기인 광해군~현종 대에는 4건이다. 그리고 숙종 대부터는 유희춘의 담양 후손들의 호구단자와 준호구 등 호적자료가 전해오며, 이후 고종 대까지는 준호구 자료가 연결된다. 특히 현전하는 자료 가운데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순조~철종 대의 자료들은 유희춘 후손들의 생활사와 관련된 문서이다. 물론 이 시기의 자료들은 주로 담양 선산유씨가의 문중 산송(山訟)과 관련된 청원서가 가장 많으며, 이외에 문중 후손들의 생활사를 전달해주는 매매문서(賣買文書) * 수기(手記) * 수표(手標), 문중 선조들의 행장(行狀) * 비문(碑文) * 족보(族譜) * 호총기(戶摠記)들이다. 담양 모현관 소장 고문서 * 고문헌 자료는 임진왜란 이전 시기의 고문서가 8건이나 있으며, 임란 이후 사회경제사와 제도사, 생활사의 변모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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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월정
정자라기보다는 절의 느낌이 드는 분위기이다. 정면 4칸의 좌우퇴, 측면 2칸의 전퇴, 팔작지붕에 한식기와를 얹은 건물이다. 4칸의 실(室)중에서 좌우의 실(室)은 방으로 쓰고 중앙 2칸은 마루를 깔아 강당형식으로 쓰고 있다. 원래 이곳은 고려 경종 1년(916)때 창건된 대자암(大慈庵)의 절터인데 후에 폐사(廢寺)가 되었다. 조선 세조 3년(1457) 언양인(彦陽人) 추제 김자수(楸齊 金自修)가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인 이곳에 돌아와 대자암(大慈庵)터에 상월정(上月亭)을 창건하였다가 손자사위인 함평이씨(咸平李氏) 덕봉 이경(德峰 李儆)에게 양도하였다. 그 후 이경(李儆)은 사위 학봉 고인후(鶴峰 高因厚)에게 다시 양도하여 줌으로써 김(金), 이(李), 고(高) 삼성(三姓)과 기연을 지니게 된 것이다. 1808년 연재(淵齋), 초정(草亭) 2공(二公)이 이를 중창하였고 1851년 신해년(申亥年)의 수해로 또다시 고재준(高在俊), 고광조(高光造) 등이 보수하였고, 1858년 월헌장(月軒丈)이 서까래와 보를 수리하는 등 여러 차례 개·보수(改·補修)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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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평시장
장날 : 5일, 10일 장소 : 창평면 사동길 14-25(창평리 209-1) 일원 규모 : 3,927㎡ (49개 점포) 노점은 제외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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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 담당자 :
- 관광정책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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