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문학기행

제5장 송강은 지금도 흐르는 데 - 송강정에서 (10)

김세곤 부서명 07.07.10 9988

송강은 지금도 흐르는 데 - 송강정에서 (10)


     -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에 대한 후세의 평가






  그러면 여기에서 송강이후 후세 사람들이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어떻게 평가하였는지를 살펴보자.



  이 두 미인곡에 대한 평가를 한 사람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 <구운몽>의 작가 서포 김만중, <순오지>의 저자 홍만종, 서포의 손자 북헌 김춘택, 그리고 김상숙, 이덕무 등이다.



  그 중에도 서포(西浦) 김만중(1637-1692)의 평가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우리나라의 훌륭한 문장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세 편뿐’이라고 극찬하면서 이 가사들을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비겨 동방의 이소' 라고 하였다.






  김만중이 <서포만필>에서 쓴 송강가사의 평을 좀 더 자세히 보자.






 송강의 <관동별곡> <전. 후 미인가>는 우리나라의 <이소> (초나라 굴원이 지은 부의 이름. 굴원이 조정에서 쫓겨나 임금과의 이별을 슬퍼하며 읊은 대서사시 :필자 주)이나 그것은 한자로써는 쓸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악인(樂人)들이 구전하여 서로 이어받아 전해지고 혹은 한글로 써서 전해질 뿐이다. 어떤 이가 칠언시로써 <관동별곡>을 번역하였지만 아름답게 될 수 없었다. 그것은 택당(澤堂)이 젊어서 지은 작품이라 하지만 옳지 않다.



  구마라습(인도의 학승으로 대승불교에 능통하여 전진의 왕 부견에게 중국으로 끌려와 법화경 중론등 많은 불경을 번역함 : 필자 주)이 말하기를, “천축인의 풍속은 문채(文彩)를 가장 숭상하여 그들의 찬불사는 극히 아름답다. 이제 이를 중국어로 번역하면 단지 그 뜻을 알 수 있을 뿐이지, 그 말씨는 알 수 없다.” 하였다. 분명 이치가 그럴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입으로 표현된 것에 가락을 붙인 것이 시가문부(詩歌文賦)이다. 사방의 말이 비록 같지는 않더라도 진실로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각각 그 말에 따라 가락을 맞춘다면, 똑같이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을 통할 수 있는 것이지 유독 중국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자기 말을 버려두고 다른 나라말을 배워서 표현한 것이니 설사 아주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여염집 골목길에서 나무꾼이나 물 긷는 아낙네들이 에야디야 하며 서로 주고받는 노래가 비록 저속하다 해도 그 진가를 따진다면 결코 학사 대부들의 이룬바 시부라고 하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논할 수는 없다.



  하물며 이 삼별곡(三別曲)은 천기의 자발함이 있고 이속의 비리함도 없으니 예부터 좌해의 진문장은 이 세 편뿐이다. 그러나 세편을 가지고 논한다면 <후미인곡>이 가장 좋고 오히려 <관동별곡>과 <전미인곡>은 한자어를 빌어서 수식했다.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동방의 이소’라고 한 서포의 이 평은 후세에 우리나라의 글과 문학의 고유성과 독창성을 말할 때에 가장 많이 인용하는 대목이다. 이런 민족 문학의 고유성에 송강의 <속미인곡>이 가장 대표 작품으로 인용된다는 것은 송강 본인의 영광이기도 할 뿐 아니라, 이 작품이 나온 담양 송강정 역시 영광이다. 좀 크게 말하면 담양 성산 가단의 기쁨이요. 더 크게 말하면 남도 시가 문학의 광영이다.






  한편 홍만종(1643-1725)은 <순오지(旬五志)>에서 사미인곡은 송강이 지은 가사로서 ‘시경(시경)의 미인(美人) 두 글자를 본받아 써서 시대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모하는 뜻을 부친 것으로 역시 중국 초나라시대의 백설곡(白雪曲)과 맞잡이다.’ 라고 하였고 속미인곡은 ‘사미인곡에서 다하지 못한 뜻을 말한 것인데, 표현이 더욱 좋아지고, 뜻이 더욱 간절해졌는데,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출사표(出師表)'와 백중(伯仲)할 만한 작품이라.’고 하였다. (순오지는 홍만종이 지은 수상록이다. 정철, 송순의 시가와 중국의 서유기에 대하여 평론하고, 부록으로 130여종의 속담을 실어 놓았다. 한강에서 병으로 누워 있을 때 꼭 15일 만에 완성했기 때문에 '순오지‘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홍만종 자신이 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우리말을 사용한 가사는 우리 곡조를 취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두나 언문, 즉 우리말의 사용을 주장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천주학을 소개한 이수광(1563-1628) 또한 그의 <지봉유설>에서 정철의 가사를 칭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가사는 우리말을 섞은 까닭에 중국의 악부와 더불어 견줄 수가 없다. 근세에 송순과 정철이 지은 것이 가장 훌륭하다. 그러나 입으로 회자되고 마는 데 지나지 않았으니 애석하다. ..... 근세에 퇴계가, 남명가와 송순의 면앙정가, 백광홍의 관서별곡,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사미인곡, 장진주사가 세상에 널리 전해진다. (후략)    - 지봉유설 권 13






 김춘택(1670-1717)의 송강가사의 평 또한 칭찬일색이다.






  송강의 전후미인가는 원래 국문으로 지은 것인데 그가 추방당한 울분에서부터 군신간의 이별을 남녀간의 애정관계에 비유하여 묘사하였다. 그 마음이 충성스럽고 그 뜻이 고결하며 그 지조가 곧고 우아 곡진하고 그 격조는 비분하면서도 곧아서 굴원의 <이소>와 견줄만하다. 우리 서포할아버지께서는 일찍이 이 두 가사를 손수 베껴 그 제목을 ‘언소’라고 하였다. 송강의 가사가 지닌 광채는 해와 달에 비길만하다.






  한편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허균 (1569 선조2 -1612 광해군 4)의 송강 정철의 글에 대한 평을 보자.






  정송강은 속구(俗句)를 잘 지었다. 그의 사미인곡과 권주가는 다 맑고 정중하여 들을 만하다. 비록 이단자가 이를 배척하여 사(邪)라 하지만 문채(文采)와 풍류는 가릴 수가 없어 그의 작품을 아끼는 자가 많다.






  여기에서 속구란 우리말로 된 글을 말한다. 허균이 속구를 강조한 것은 그는 개성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상의 언어, 즉 서민들이 쓰고 있는 일상어로 글을 쓰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 중국의 글을 모방하여 글을 짓는 모화적 풍습을 비판한 것이다. 이런 글쓰기의 자주성이 앞에서 본 서포 김만중의 서포만필에 이어지고 있다 하겠다.






상촌 신흠(1566-1628)의 평 또한 찬사일색이다.






  옛사람의 시는 사상 감정의 발로라고 하였는데 진시로 옳음 말이다. 그런데 정철의 시는 맑고 고상하며 특히 가사는 아름답고도 뜻이 깊다. 시조는 그지없이 고매하여 마치 무지개 같이 영롱하며 구슬같이 아름답다.






 이어서 김상숙(1717-1792)은 <사미인첩> 발문에서 ‘대개 임금이나 남편의 은총을 받고서 그 임금 그 남편을 사랑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면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임금이나 남편의 은총을 잃고서도 그 임 , 그 남편을 사랑한다는 것은 반드시 정신(貞臣) 열부(烈婦)라야만 할 수 있다.’ 라고 하여 정철의 작품을 우시연군지사 (憂時戀君之詞)로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들을 종합하여 보면 전후미인곡은 순수한 우리말로 지어진 가사라는 점, 여인의 애절한 임을 향한 노래를 빌어 임금에게 충절을 다한 연군가라는 점, 임을 위한 사모곡으로서 서민들이 널리 부르는 노래라는 점에서 크게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조선의 사대부들 간에는 한글이 천시가 되었던 시절에 송강은 일상적 우리말로 독수공방하는 여인이 임에게 보내는 사모곡을 지었으니 그냥 기록 속이나 책 속에서 느끼는 시가 아닌, 유행가인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널리 사람들에게 불리었으리라. 나는 이제 송강 정철이 지금도 가사문학의 제1인자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후세 사람들의 송강가사 애창






  그러면 여기에서 후세 사람들이 얼마나 송강의 가사를 애창하였는지를 알아보자. 전후미인곡은 정말로 사람들이 널리 애창하였나 보다. 나루터의 아낙네도 부르고, 술집에서 기생들도 불렀나 보다. 그 정황을 알 수 있는 글이 이덕무의 글이고 이안눌의 시이다.   






  먼저 책에 미친 사람 이덕무(1741 영조17-1793 정조 17)의 글을 보자. (이덕무는 서자출신으로서 규장각에서 도서편찬 사업에 적극 참여한 북학파 실학자이다. 그는 박지원과도 교유하였고, 유득공 박제가와 함께 지은 ‘건연집’이라는 시집은 중국에 까지 널리 알려졌다.)






  동악 이안눌은 어떤 사람이 송강의 사미인곡 부르는 것을 듣고 이렇게 읊었다.






강변에서 그 누가 미인곡을 부르는고.



외로운 뱃머리에 달빛이 희미한데



님 그려 애 끓는 정은



오직 아낙네들만이 아는가






江頭誰唱美人詞   正是孤舟月落時



惆悵戀君無限意   世間唯有女嫏知






  송강은 불행한 처지에서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는 지극한 뜻을 국문시가로 노래했는데, 거기에는 이소와 같은 충성과 의분이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송강의 가사와 시조는 지금도 자주불리고 있다.






  이 글에서 이덕무가 인용한 이안눌의 시는 <송강의 가사를 듣고[聽松江歌詞]>이다. 뱃머리의 아낙네가 부르는 이 미인곡은 그 내역을 알 필요도 없이 임 그리는 노래, 임을 죽도록 사모하는 한 많은 여인의 노래이다.






  한편 동악 이안눌(1571 선조4-1637 인조15)은 기생이 부르는 미인곡을 듣고 7언시를 짓는다. 담양부사를 하기도 한 그는 4,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기고 두보의 시를 만독이나 한 시인으로 당시에 권필과 더불어 쌍벽을 이룬 시인이다.






기생 옥아가 부르는 인성부원군 정상공의 사미인곡을 듣고






십년동안 상강 포구에서 향풀이나 뜯으며



맥없이 요대의 이별을 원망하네.



계집애들은 그때 일 알지도 못하고



지금 헛되이 미인사만 부르는구나.






칠아는 이미 늙고 석아는 죽어



오늘 날의 명창은 옥아 뿐이네



대청마루에서 미인사를 불러 보는데



들어보니 인간세상 노래가 아닌 듯하네.






  한 기생이 노래의 내역을 알지도 못하고 슬프게 미인사를 부른다. 기생 중에 명창인 석아는 이미 죽고 칠아는 나이가 많아 목소리가 안 나와서 오늘날의 명창은 옥아뿐이다. 옥아는 대청마루에서 사미인곡을 부른다. 이 노래를 들어보니 정말로 구슬프고 애련하여 이 세상 노래가 아닌 것 같다.






  지금까지 나는 너무 한참 동안이나 송강정 뒤뜰의 사미인곡 비 앞에 있었다. 이제 송강정을 내려온다. 내려 올 때는 올라갔을 때와 다른 길이다. 돌계단 길이 아닌, 시누대가 심어져 있는 흙길로 내려온다. 가냘픈 시누대는 바람에 흔들려도 부러지지 않고 흥청흥청 거리면서도 세파를 무던히도 잘 견디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박종화의 소설 ‘자고 가는 저 구름아‘에서 송강이 강계에 유배 중 일 때 기녀 강아가 ’사미인곡‘을 부르고 송강이 ’속미인곡‘을 부르는 대목을 떠올렸다.   






  자, 이제는 면앙정으로 발길을 옮기자. <성산별곡>의 모태가 된 <면앙정가>을 지은 송순을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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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광정책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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