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문학기행

제6장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면앙정에서 (7)

김세곤 부서명 07.09.04 7484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면앙정에서 (7)








  한편 송순과 소세양의 시와 소쇄처사의 시 사이에는 <하여면앙정(荷與俛仰亭)>이란 어제(御題) 편액이 붙어 있다. 이 편액을 살펴본다.






어제(御題)



호남교준유생응제시제(湖南校準儒生應製試製)



 








정조는 정조 22년(1798년)에 도과를 광주에서 실시하라고 명하였다. 이 때 광주목사는 서형수이다. 시제는 ‘하여면앙정(荷與俛仰亭)’이었다. 






  담양읍지에 가로되 송순의 아호는 기촌(企村)인데 20세에 과거에 올랐으니 그 문장력은 당세에 표준이요 으뜸이었다. 네 분 임금을 섬기고 관직에서 은퇴하여 고향 땅 언덕 위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면앙정이라 하였으니 대개 면앙이라는 뜻은 우주를 두루 살펴본다는 뜻이다. 선생께서 임금을 사랑했던 충성심은 많은 시구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급제에 오른 지 60주년 그날을  맞아 면앙정 위에서 베푼 잔치는 마치 급제에 오른 그 때와 같았으며 온 전라도가 떠들썩하였다. 술기운이 절반이나 취할 무렵 당시 수찬 정철이 가로되 우리 모두가 이 어른을 위해 죽여를 매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헌납 고경명, 교리 기대승, 정언 임제 등이 죽여를 붙들고 내려오자 각 고을 수령들과 사방에서 모여든 손님들이 뒤를 따르니 사람들 모두가 감탄하여 광영으로 여겼다. 이는 시로 옛날에도 없었던 훌륭한 행사였다.






 ( 김성기,  면앙송순시문학 연구, 국학자료원, 1998, p446에서 인용)



 



  송순은 87세 때(1579년) 이곳 면앙정에서 그의 과거 급제 60돌을 축하하는 잔치인 회방연을 열었다. 이 잔치는 임금도 술과 꽃을 하사할 정도로 성대하게 이루어졌는데 송순이 침소에 들려고 할 때 송강 정철이 송순 선생의 남여를 직접 매어드리자고 제안을 하여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고봉 기대승, 백호 임제 등 네 사람이 남여를 직접 매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어제 편액에는 기대승도 이 남여를 매었다고 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기대승은 이미 7년전(1572년)에 별세하였기 때문이다. 면앙집에 실려 있는 이 기록을 단순한 실수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의도적인 기록이라고 하여야 할까. 나는 이 기록을 의도적인 기록으로 생각한다. 송순의 회방연에 고봉 기대승이 참석한 것이면 그만큼 그 잔치의 명성이 더 높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의도적으로 참석자 명단에 고봉을 넣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16세기 중엽의 고봉 기대승의 명성은 퇴계 이황과의 7년간에 걸친 사단칠정론 편지 왕래로 인하여 매우 높았다.) 






  이 일화를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정조 시절에 정조 임금이 전라도 유생들에게 시험문제로 내었으니 송순은 꽤나 호남에서 유명한 사람이다. (한편 송순은 90세 까지 장수한 사람이다. 송순의 회방연은 송강이 두 번째 창평에 낙향하였을 때 열렸다.)






  여기에서 나는 이 면앙정 마루위에 걸린 어제(御題)에 적힌 회방연 행사에 남여를 맨 네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주목을 한다. 고봉 기대승(1527-1572), 제봉 고경명(1533-1592), 송강 정철(1536-1593), 백호 임제(1549-1587). 이 네 사람의 인연은 정말 재미있다.






  고봉은 송강의 스승이고, 제봉과 송강은 식영정 4선으로 서로 친구이고, 송강과 백호와도 친구이다. 그런데 고봉과 제봉과는 불편한 사이였던 것 같다. 나는 이런 인연들을 여러 책에서 찾았다. 






  먼저 고봉과 송강과의 관계이다. 송강은 고봉으로부터 근사록을 배우고 학문을 익힌다. 특히 선비가 평소 지녀야할 마음가짐과 행동도리를 고봉에게서 배운다. 고봉은 송강보다 9살 위이기는 하나 그는 나이 44세(선조3년 1570년))에 퇴계가 선조에게 추천하여 대사성(지금의 국립대총장)을 할 만큼 학문이 높았다. 또한 그는 조광조와 함께 못 다 이룬 개혁을 한 그의 숙부 기준의 기질을 닮아 매우 개혁적이었다. 






  고봉은 송강을 상당히 똑똑한 제자로 생각한 듯하다. 한번은 고봉이 일찍이 산에 올라 놀다가 수석 한 개를 보았다. 그 수석은 특이하게도 맑고 깨끗하였다. 그 때 어떤 이가 ‘세간 사람으로서 인품이 이에 비길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고봉은 ‘오직 정철이 그러하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고봉 기대승은 선조 5년(1572년) 11월에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 때 송강은 다음과 같이 제문을 짓는다.






기고봉 선생 제문






소자가 선생님을 사모한 지가 이미 오래이오나, 오늘에 이르러 더욱 간절해지는 까닭은 선비들의 풍조가 더러운데 물드는 것을 누가 능히 맑게 하며,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가 낮게 떨어지는 것을 누가 능히 높일 수 있겠는 가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것을 높이고 맑게 하실 분은 오직 우리 선생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가신 후로는 세상에 그럴 사람이 없사오니, 외로이 서 있는 사당엔 남기신 자취만이 눈에 선 하옵니다.  






  고봉이 세상을 뜬 당시에 송강은 37살이었다. 그는 부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 신원 선산에서 시묘살이를 하고 다시 벼슬길에 오른 때 였다. 이 시기는 아직 동서 당쟁이 본격화 된 시기는 아니었으나, 송강의 제문 내용으로 보아 사림들의 세속화와 패거리가 상당히 심각함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봉 기대승과 제봉 고경명과의 어색한 만남 이야기도 재미있다. 선조 4년(1571년) 3월 퇴계 이황의 장례가 있던 때 고봉은 멀리서나마 인사를 하려고 한 것인지 여러 제자들과 함께 무등산 규봉에 올랐다. 무등산에서 고봉은 ‘퇴계 선생의 장례날에 문수암에서’란 시 두수를 짓는다.






선생은 세상이 싫어 백운향에 가셨는데



천한 제자는 슬픔 머금고 이곳에 있네.



멀리서 생각하니 오늘 무덤에 묻히실 텐데



사방의 궂은 안개가 차츰 아득해지네.






한 기운이 유유하게 갔다가 돌아오니



화려한 집에서 황천으로 떨어짐을 어찌 견디랴.



산머리에서 나도 모르게 마음속이 아프니



쇠약한 몸 백발 여생이 외로워졌네.






  이 날 고봉은 창평의 식영정에서 하루를 보낸다. 거기에서 고봉은 제봉을 만난 것이다. 당시 고경명은 부친 고맹영과 장인 김백균이 이량의 당이었다는 이유로 파직된 상태이었다. 그런데 고봉은 이량을 탄핵한 사람이어서 두 사람의 만남은 상당히 불편한 만남이었다. 먼저 기대승이 고경명에게 시를 한 수 건넨다. 






세속 떠난 정을 다하지 못하지만



인간사 혹은 어긋남이 있으니



잔과 소반을 주인과 손님이 같이 쓰며



고금의 일을 서로 나누다가



술 맛에 기울어 즐거움이 되고



노랫소리 들으니 노래가 절로 나온다



성산의 이 밤에 만났으니



백년의 회포는 쓸어버리세






  비록 정치적으로 서로 어긋났으나 그런 인간사를 오늘은 털어버리자는 고봉의 말이 의미가 있다. 오늘 퇴계 선생의 장례날에 술이나 마시고 회포를 풀자는 말이 무척 인간적이다.






  고봉은 이로부터 1년 후인 선조 5년 (1572년)에 별세한다. 반면에 제봉 고경명은 한동안 힘들었지만 고봉과의 만남 이후 10년 되는 해 1581년에 영암군수가 되어 다시 벼슬길에 오른다. 그리고 1591년에 동래부사를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창평에 사는 데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60세의 노장인 그는 분연히 두 아들과 함께 3부자가 의병으로 나선다. 의병장 고경명은 호남의 선비들에게 조선을 위하여 싸우자고 격문을 보낸다. 이 격문이 오늘날까지도 일부 식자층에게 잘 알려져 있는 ‘마상격문’(馬上檄文)이다. 이 격문은 최치원의 ‘황소격문’(黃巢檄文),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와 함께 3대 격문에 들어갈 만큼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옷소매를 떨치며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고 군중과 맹서하니,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는 천둥 울리듯 바람 치듯 달려오고, 수레를 뛰어 오르고 관문을 넘어가는 무리는 구름 모이듯 비 쏟듯 한다.는 내용의 마상격문은 광주, 남원, 전주, 여산을 비롯한 전라도 선비들의 심금을 울려 6천명의 전라도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결국 그는 1592년 7월에 금산 전투에서 둘째 아들 고인후와 함께 전사한다. 그의 큰 아들 고종후도 1593년 진주성싸움에서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논개의 애인인 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한다.






  한편 나는 <국역 송강집>에서 송강이 제봉을 위하여 지은 시를 찾아보았다. 송강이 지은 시는 ‘제봉의 운에 차하여’ 라는 시 이다.






손꼽아 헤어보니 산중 살이 십년이라



사직하고 다시 오니 백발이 새롭구려.



수석이랑 친구들은 사랑스럽지만



봉래산 소식은 아득하여라



산 바람 밤에 일어 마른 대 시름하고



고개에  달 갓 돋으니 바로 곧 미인이라



약 마시고 시 짓느라 잠 못 드는 데



지붕머리 종소리 맑은 새벽 알려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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