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문학기행

제7장 너럭바위 위에 송죽을 헤치고 - 면앙정가비 앞에서(2) <마지막회>

김세곤 부서명 07.09.18 9952

너럭바위 위에 송죽을 헤치고 - 면앙정가비 앞에서(2)








  이렇게 여러 가지를 보고 즐기니 몸이 쉴 겨를이 없다. 그러다 보니 청려장도 무디어 간다.






간 곳마다 아름다운 경치로다. 인간세상 떠나와도



내 몸이 겨를 없다.



이것도 보려 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



바람도 쏘이려 하고 달도 맞으려 하니



밤일랑 언제 줍고 고길랑 언제 낚고



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진 꽃이란 누가 쓸려뇨.



아침이 나쁜데 저녁이라고 싫을소냐



오늘이 부족한데 내일이라고 넉넉하랴



이 뫼(산)에 앉아 보고 저 뫼(산)에 걸어보니



번거로운 마음에도 버릴 것이 전혀 없다.



쉴 사이 없거든 길이나 전하리라.



다만 한 청려장(靑藜杖)이 다 무디어 가는 구나.






  청려장. 이 지팡이는 노인에 대한 존경과 권위의 상징인 지팡이 중에서 최상품 지팡이이다. 1년생 풀인 명아주의 줄기를 말려서 만든 지팡이인 청려장은 재질이 가볍고 단단하여 노인이 짚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옛날 고사에는 신선들이 주로 청려장을 짚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지팡이의 이름이 명아주의 잎이 돋아날 때 색깔이 푸른색이라서 청(靑)자를 붙였다는 데, 푸른색은 영원함을 상징한다. 앞의 송순의 시 면앙정 삼언가에도 청려장이 나온다. ‘부여장 송백년(扶藜杖 送百年:청려장을 짚고 백년을 보내리라!).’ 



  한편 몇 년 전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받은 선물이 바로 청려장이란다. 특히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의하면 청려장은 중풍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어 노인들에게 선물로 적합하다고 한다.






  이 청려장이 면앙정가에 등장하고, 앞에서 남여(藍輿 - 덮개가 없는 4인교 죽여라고도 하며 주로 산길을 갈 때 이용하였다 함)도 등장하는 것 보니 이 가사는 송순이 적어도 70살(1562년)은 넘어서 지은 가사라는 생각이 든다.  






  이어서 <면앙정가>는 술과 벗 그리고 노래와 거문고(또는 가야금, 송순은 가야금을 잘 탔다고 한다.)가 있는 신선놀음을 읊는다. 그래서 악양루 위에서 노는 이태백 보다 더 좋다고 노래한다.






술이 익었거니 벗이야 없슬소냐.



부르며 타며 켜며 흔들리며



온갖 소리로 취흥을 재촉하니



근심이라 있으며 시름이라 붙었으랴.



누으락 앉으락 굽으락 젖히락



읊조리며 파람불며 마음놓고 놀거니



천지 넓고 넓고 일월도 한가하다.



의황을 모르더니 이몸이야 그로고야.



신선이 어떻던가 이 몸이 신선이로구나.



강산 풍월 거느리고 나의 백년을 다 누리면



악양루 위의  이태백이 살아와도



호탕 정회야 이보다 더할소냐.






  그런데 이 가사는 내가 이렇게 이백처럼 유유자적한 것도 또한 역군은(亦君恩)이삿다(임금의 은혜이시도다.)라고 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






  마지막 구절인 ‘이 몸이 이런 것도 역군은(亦君恩)이삿다.’는 면앙정가를 단번에 반전시키는 어구이다. 이 모든 것이 다 임금님의 성은 때문이라고 단순화하여 버린다.






  하기야 50년간이나 벼슬을 한 몸이 임금의 은덕을 이야기 안하고 도연명이나 양산보처럼 은둔의 무위도가를 읊는다는 것은 조금은 낯 간지러운 일이었으리라. 






  한편 면앙정가에 대한 후세의 평은 극찬 이상이다. 홍만종은 <순오지>에서 면앙정가를 ‘송순(宋純)이 지은 것이다. 산수(山水)의 경치 좋음을 있는 대로 다 말하고 거기서 노는 즐거움을 늘어놓은 것으로 그의 흉중(胸中)에는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들어 있다.’고 평하고 있고,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송순과 정철의 가사가 훌륭하다고 극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가사는 우리말을 섞은 까닭에 중국의 악부와 더불어 견줄 수가 없다. 근세에 송순과 정철이 지은 것이 가장 훌륭하다. 그러나 입으로 회자되고 마는 데 지나지 않았으니 애석하다. ..... 근세에 퇴계가, 남명가와 송순의 면앙정가, 백광홍의 관서별곡,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사미인곡, 장진주사가 세상에 널리 전해진다. (후략)    - <지봉유설 권 13>






  여기에서 한 가지 더 밝힐 것은 송강 정철은 우리말 가락을 절묘하게 아름답게 묘사하는 기법을 송순으로부터 많이 배웠다는 것이다.  어느 경우엔 송순의 시도 송강집에 수록 되어 있어 송강작품으로 간주되는 경우도 있었다. 송강의 성산별곡은 송순의 면앙정가의 기법을 잘 따온 작품임은 웬만한 국어학자들은 다 안다. 송강의 관동별곡도 기봉 백광홍이 지은 <관서별곡>에서 그 기법을 배운 것이다. 






여기에 그 예를 들어 본다. 먼저 면앙정가와 성산별곡이다.






<면앙정가>



용천산 나린 물이 정자 앞 너븐 들에 올올히이 펴진드시



넙거든 기디마나 프르거든 희디마나



..............



닷난듯  따르는 듯 밤낮즈로 흐르는 듯.






<성산별곡>



창계의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렀으니



직녀의 좋은 비단  그 누가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치는 듯 요란도 하는 구나.






<면앙정가>



술이 익었거니 벗이야 업슬소냐.



부르며 타며 혀이며 이야며



온갖 소리로 취흥을 재촉하니



근심이라 있으며 시름이라 브터시랴.






<성산별곡>



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는가.



잡거니  밀거니  슬카장 거후이니



마음의  매친 시름 져그나 하리나다.






  다음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과 기봉 백광홍의 <관서별곡>의 비교이다. <관서별곡>은 <관동별곡> 보다 25년 먼저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경기행가사이다.






<관서별곡> 



관서명승지에 왕명으로 보내실시



행장을 다사리니   칼 하나 뿐이로다



연조문 내달아     모화고개 넘어드니  



  ....                                                       



벽제에 말 갈아      임진에 배 건너                  



천수원 도라드니     송경은 고국이라



                                    



 <관동별곡>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팔백리에       방면을 맡기시니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연추문 돌라드라    경회 남문 바라보며



       ......



  평구역 말을 갈아   흑수로 도라드니



  섬강은 어디메노    치악은 여기로다






  이렇게 송강은 선배들의 시작(詩作) 기법을 잘 응용한 대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우리말의 감칠맛과 운율과 형용을 너무 잘 알고 있어, 서민들의 입맛에 맞는 어휘 선택과 탁월한 표현력, 시적 형상성을 꾸며내기 때문이다. 나는 송강이 이렇게 우리말의 조형성을 잘 구사하고 있는 것은 그의 나이 10세에서 16세까지 동안에 을사사화로 인하여 귀양을 간 아버지를 따라 다니면서 서민들의 생활을 접한 것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생각한다. 임금의 친척에서 귀양살이한 몸으로 떨어진 그의 어린 시절은 그에게 천국과 지옥, 가장 고상한 것과 가장 천한 것을 한꺼번에 경험하게 하였다. 그런 그였기에 서민들이 쓰는 우리말을 잘 구사한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리라.   






  나는 이제 면앙정가비를 다 보고 나서 정자 앞 들판에 있는 참나무 한 그루를 본다. 이 나무는 송순이 정자를 지은 후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 전해진다.






  이왕 이곳에 왔으니 송순의 묘를 찾으러 간다. 안내판이 세워진 쪽 오솔길로 100미터쯤 가니 무덤이 여러 개 있다. 그런데 무덤의 비석을 보니 송씨의 묘는 여러 개 있으나 송순의 묘는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다시 정자입구로 나와서 절이 있는 길을 가서 묘를 찾았으나 찾지 못한 채 그만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송강이 쓴 <면앙 송순 제문>을 읽는다. 송강은  면앙정 송순이 별세하자 즉시 담양으로 달려 와서 이 제문을 짓고 조의를 표하였다 한다.






슬프도다. 세상살이 험난한 길을 겪고 겪은 자 많으나, 그 넘어지지 않은 이 역시 드문데, 조정에서 계신 60여년을 대로로만 따르며, 마침내 크게 넘어지지  않은 이로 상공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오늘 저의 비통함이 사사로운 인정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아아! 슬프고 서럽도다.



 



 면앙 송순. 그는 관용(寬容)과 대도(大道)의 학자였다. 그는 부인 설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이 해관(海寬)과 해용(海容)이었다. 앞의 ‘해(海)’ 항렬자 뒤에 붙인 이름자가 ‘관’과 ‘용’이다.  두 아들의 뒤 글자를 합치면 관용이 된다. 이는 그만큼 그가 관용을 신조로 하는 포용의 삶을 살았다는 증거이다. 그가 대도의 학자로 평가 받는 것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로 희생당한 사림들에 대한 비통함을 시로 표현하면서 큰 길을 가고자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면앙이란 그의 호가 말 해 주듯이 하늘에게도 사람에게도 진정 부끄러움이 없는 삶, 대도의 길을 가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우리말 표현을 정말로 잘 하여 송강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보니 정철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남도 땅 창평에서 사는 동안 인연 운이 있어서, 인복(人福)이 있어서 당대 최고의 스승을 만났으니.  사촌 김윤제를 만나 그의 외손녀와 혼인도 하고 생활도 안정되었으며 하서 김인후에게는 도학과 초사를, 고봉 기대승에게는 근사록을  그리고 석천 임억령에게는 한시를, 송순에게는 우리말 가사를 배웠으니 그가 우리말 가사와 한시등에 능하고 과거에 장원급제한 것은 모두 다 이들 호남가단 최고수들의 덕분이라 하겠다. 창평은 송강에게 그의 고향보다 더 많은 은혜를 베푼 곳이다. 






이제 나는 면앙정을 내려온다. 대숲을 내려오면서 하서 김인후의  <자연가>를 읊는다. 자연에 묻혀서 이 풍진 세상에 초탈한 우리네 선비의 삶을 노래한 절로절로 노래를.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 절로 물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



아마도 절로 생긴 인생이라  절로 절로 늙어가리.   









             (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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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광정책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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