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문학기행

제4장 대숲 바람 부는 소쇄원에서(1)

김세곤 부서명 07.01.10 5177

제4장 대숲 바람 부는 소쇄원에서(1)






  식영정에서 소쇄원까지는 1Km 정도이다. 소쇄원으로 가는 길에는 자미화가 활짝 피어 있다. 진한 분홍색 꽃이 길에 피어 있으니 송강이 살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소쇄원 주차장에는 담양 소쇄원 안내판과 성산 등산로 안내판이 있다. 소쇄원 안내판은 이렇게 적혀 있다.






담양 소쇄원






                           사적 제 304호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






  소쇄원은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원림(園林)으로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풍기는 아름다움이 있다.



  양산보(1503-1557)가 조성한 것으로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를 당하여 죽게 되자 출세에 뜻을 버리고 이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소쇄원이라 한 것은 양산보의 호인 소쇄옹에서 비롯되었으며,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오곡문 담장 밑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 물은 폭포가 되어 연못에 떨어지고 계곡 가까이에는 제월당(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집)과 광풍각(비 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뜻의 사랑방)이 들어서 있다.



  소쇄원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모습을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가 남아 있어 원형을 추정할 수 있다. 이곳은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토론하고 창작활동을 벌인 선비정신의 산실이기도 했다. 지금의 소쇄원은 양산보의 5대손 양택지에 의해 보수된 모습이다.






 이 안내판에 적힌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풍기는 아름다움이 있다.’,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토론하고 창작활동을 벌인 선비정신의 산실’이라는 말이 인상 깊다.



 






 

  소쇄원 입구에서 관람료를 내고 울창한 대밭 길을 걸어간다. 푸른 왕대가 즐비한 대숲 길은 매우 운치가 있다. 지조와 절개의 상징인 대나무, 요즘은 웰빙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는 대나무 숲을 걸으니 마음 또한 청량하다.






  소쇄원은 남쪽으로는 무등산을 바라보며, 성산의 장원봉과 까치봉을 잇는 산줄기를 뒤에 엎고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는 원림이다. 그 경치는 마치 중국의 주자가 성리학을 가르쳤다는 무이구곡과 같다. 이 원림의 주인은 소쇄옹 양산보(1503-1557)이다. 그의 본관은 제주이고 자는 언진으로서 이곳 담양 창평 창암촌에서 창암 양사원의 세 아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창암공은 양산보가 15세 되던 해(1517년)에 그를 서울의  조광조의 문하에 수학시킨다. 이 때 그는 성수침, 성수종 형제와 같이 소학을 배운다. 그 당시 대사헌인 조광조는 중종의 총애를 받아 개혁정치와 지치주의 실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양산보는 17세(1519년)에 현량과에 응시하여 합격을 하나 합격자 수가 너무 많아 발표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빠진다.






  그런데 그 해 겨울에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이 남곤, 심정등 보수 세력에 의해 좌절이 되고 중종 임금도 조광조에게서 등을 돌린 것이다. 그리고 조광조는 화순 능주의 적려유허지에 귀양 온 지 한 달 만에 사약을 받고 죽는다. 그가 죽으면서 쓴 절명시가 유명한 애우가(愛憂歌)이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






 愛君如愛夫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그의 죽음으로 개혁은 물거품이 되었고 그와 뜻을 같이 하였던 사람들은 죽거나 귀양을 가거나 은거를 하게 된다. 17세의 양산보도 마찬가지였다. 스승인 조광조가 갑작스럽게 사사 당하였으니 그 충격이 엄청나게 컸으리라. 그는 이런 세상에서 벼슬을 하는 것을 접고, 나이 18세(1520년)에 고향인 창평으로 귀거래를 한다. 그리고 평생 세상에 나가지 않고 자연에 묻혀 살며 처사(處士)의 길을 걸으면서 창암촌의 산기슭에 나무와 화초를 가꾸고 별당을 지어 원림을 조성하는 데에 온 힘을 쏟는다. 






  그런데 소쇄원은 그가 창평에 내려와서 단번에 만든 원림이 아니다. 그는 30대 초반인 1530년경부터 시작하여 초정을 짓고, 나무를 심고 화초를 가꾸고 담을 쌓고 집들을 짓고 하여 40대 후반인 1548년에야 마무리를 한다. (이런 일련의 작업을 알 수 있는 것이 면앙정 송순과 하서 김인후의 시이다. 그리고 이 소쇄원 조영에는 송순과 김인후의 도움이 많았다.)






  우선에 나는 왜 양산보가 이곳을 소쇄원이라고 이름 지었는지가 궁금하였다. 소쇄(瀟灑)란 한자는 읽기도, 뜻을 알기도 힘든 단어이다. 소쇄(瀟灑) ! 이 말은 ‘맑고 깨끗하다’라는 뜻인데 그 출처가 중국 제나라의 문인 공치규(447-501 자는 덕장)가 쓴 <북산이문 北山移文>이다. 여기에 소쇄출진지상(瀟灑出塵之想 : 맑고도  깨끗하며 세속을 뛰어넘는 고결한 사상)이란 말이 나온다. 이 <북산이문>은 종산에 은거하다가 혜염 현령으로 조정에 출사한 주옹(周翁)이 임기를 마치고 다시 종산으로 은거하려 하자, 평소에 주옹의 출사를 못마땅하게 여긴 공치규가 신령의 말을 빌려 주옹이 다시 이 산으로 은거하지 못하게 한 경고문이다.






  소쇄원 안으로 들어오니 날씨가 가을이라 그런지 마음이 한가하다. 혼자서만 갈 수 있는 위교(危橋: 위태로운 다리) 건너에는 집이 두 채 있다. 입구 바로 앞에는 연못이 있고 흙 담이 있는 데 조금 멀리 초가로 지은 정자가 하나 있다. 나는 담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간다. 담은 토석담이다. 흙냄새가 난다. 조금 걸어가니 초정에 도착한다. 여기가 바로 대봉대(待鳳臺)이다. 대(臺)는 원래 야트막한 둔덕이나 절벽의 평지에 세우는 데 소쇄원의 경우는 계곡에 막돌로 석축을 쌓고 여기에 따로 집을 짓지 않고 초정을 지었다.






  대봉대(待鳳臺)는 ‘기다리는 손님을 주인이 봉황처럼 모시는 곳’이라는 의미의 정자 이름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대봉대는 ‘봉황을 기다리는 대’라는 뜻도 된다. 봉황은 나라가 태평한 세월에만 나타나는 상상속의 새이며 성군의 의미도 있다. 임금다운 임금, 덕치를 하는 성군이 오기를 기다리는 대.






 소쇄옹이 왜 하필 이 정자 이름을 대봉대라고 했을까. 이는 소쇄옹의  생애와 연관 지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쇄옹은 젊을 적에 정암 조광조에게서 학문을 배우며 개혁 정치의 필요성을 절감한 인물이다. 하지만 스승의 뜻은 기득권 세력의 모함과 반대, 그리고 당시 왕이었던 중종의 아둔함으로 좌절이 되었고, 자기 자신은 귀거래 하게 되었던 것이다. 군주가 조금이라도 현명하였다면 그의 스승이 죽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에 더욱 왕 다운 왕, 성군이 나길 염원하였을 것이다. 바로 이런 염원에서 초정이름을 ‘대봉대’라고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봉대는 단지 초가의 정자만으로 완결 된 것은 아니다. 대봉대의 맞은편에는 오동나무가 심어져 있고 대밭이 조성되어 있다.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오로지 대나무 열매인 죽실만 먹기에 이렇게 오동나무와 대나무를 심어놓은 것이다. 봉황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1985년에야 복원된 이 초정은 소쇄원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한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시가 바로 면앙정 송순(1493-1582)의 시이다. 양산보와 이종 간(송순의 고모가 양산보의 어머니임)인 면앙정 송순이 1534년에 지은 ‘외제 양언진 소쇄정 4수 가정 갑오’시에는 초정 이야기가 나온다.   






작은 집 小閣 영롱하게 지어져 있어



앉아보니 숨어살 마음이 생긴다.



연못의 물고기는 대나무 그늘에서 노닐고



오동나무 밑으로는 폭포가 쏟아지네.



사랑스런 돌길을 바삐 돌아 걸으며



가련한 매화 보고 나도 몰래 한숨 지어



숨어 사는 깊은 뜻을 알고 싶어서



날지 않는 새집을 들여다보네. 






  작은 집, 연못, 대나무 그늘, 오동나무 아래 폭포, 매화꽃 등등 소쇄원의 정경이 자세히 적혀있다. ‘숨어사는 깊은 뜻을 알고 싶어서 날지 않는 새집을 들여다보네.’ 란 마지막 구절은 자연에 묻혀 사는 소쇄옹의 마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김안로의 전횡으로 1533년부터 창평에 낙향하여 살고 있는 송순의 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소쇄옹의 사돈인 하서 김인후(1510-1560)도 1538년에 ‘소쇄원 즉사’ 시를 쓴다.






대숲 너머 부는 바람 귀를 맑게 하고



시냇가 밝은 달은 가슴을 비추네.



깊은 숲은 서늘한 기운 보내 주는데



높은 나무는 엷은 그늘이 드리우네.



술이 익어 가볍게 취기를 띠자



시가 지어져 조용히 읊조리네.



한밤중 들려오는 처량한 소리는



피눈물 자아내는 두견새의 울음.






 瀟灑園卽事






 竹外淸風耳            溪邊月照心



 深林傳奭氣            喬木散輕陰



 酒熟乘微醉            詩成費短吟



 數聲聞半夜            啼血有山禽






 소쇄옹과 하서 두 사람은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시냇가에 비추는 맑은 달빛 아래서 술을 마시며 도인처럼 시를 짓고 자연을 즐기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은 ‘한밤중에 들려오는 처량한 소리는 피눈물 자아내는 두견새 울음’으로 끝난다. 비탄과 처연함이 밤의 적막을 깬다. 두견새, 초나라에서 쫓겨난 비운의 왕 두우(杜宇)가 죽어서 두견새가 되었고, 초나라를 못 잊어 하는 두견새의 피눈물 소리가 ‘귀촉성’이라는 고사가 있는 새. 나는 이 두견새의 울음이 밤을 비탄과 처연함으로 만든다는 하서의 시 마지막 구절에서 1519년 기묘사화로 희생을 당한 정암 조광조와 신재 최산두등 사림들을 생각하였다. 기묘사화가 소쇄옹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듯이, 기묘명현의 희생들이 두견새에게 피 눈물 소리를 내도록 하였다고 하서는 생각한 것이리라. 하서는 어쩌면 이 시를 소쇄원에서 쓰면서 2년 전(1536년)에 죽은 스승 신재 최산두 선생이 생각났을 수도 있다. 



 



<대봉대>  



                                         <대 봉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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