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문학기행

제2장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1)

김세곤 부서명 06.11.27 5415

제2장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1)







  식영정은 환벽당에서 차로 1-2분도 안 걸리는 지척거리에 있다. 충효교를 막 지나니 바로 식영정 입구이다. 그런데 지역은 담양이다. 창계천(자미탄)을 경계로 하여 한 쪽은 광주이고 다른 한쪽은  담양이다.



나는 식영정 입구에 도착하여 먼저 식영정 안내판을 본다.






식 영 정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75-1






  이 정자는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것이다.



  김성원은 이 정자 옆에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는 또 다른 정각을 지었다고 하며 최근 복원 하였다.



  김성원은 송강 정철의 처외재당숙으로 송강보다 11년이나 나이가 많으나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하였다. 이 정자에서 정철, 고경명, 백광훈, 송익필 등과 교우하면서 동운 28수를 지었으며, 송강의 성산별곡도 이 정자에서 바라다 보이는 수려한 자연경관을 주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송강문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온돌방과 대청이 절반씩 차지하고 있다.



 


  이 안내문을 보면서 서하당 김성원과 석천 임억령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관심을 갖는다. 식영정에 올라가기 전에 나는 먼저 서하당을 들른다. 서하당은 김성원이 살았던 집인데 식영정과 함께 1560년에 지었다. 그 옆에는 부용당이 있다. 이 두 집들은 모두 최근에 복원되었다.. (부용당은 1972년에 지어 졌고 서하당은 1998년에 지어 졌다 한다. 그런데 원래의 서하당 터에 부용당이 자리 잡고 있다 한다. 지금이라도 이 집들의 위치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450년 전의 정취를 그대로 맛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서하’는 ‘노을이 깃을 들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노을이 깃드는 곳은



다름 아닌 자연이다. 따라서 ‘서하당’은 이름 자체가 자연과의 합일, 즉 물아일체(物我一體)를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서하당은 평지에서 돌계단을 10여개 오른 후 단(壇)위에 세워져 있다. 집은 난간이 있고 방 한 칸과 마루가 있다. 나는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간다.






  자세히 둘러보니 마루 위에는 네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마루 위에는 석천 임억령이 쓴 서하당 20영 한시, 김성원이 쓴 서하당 8수, 그리고 송강 정철이 쓴 서하당 4수 편액이 차례로 걸려 있고, 입구 바로 위에는 송강의 성산별곡 편액이 걸려 있다.






  서하당 20영이라. 식영정 20영이란 말은 들어 보았어도 서하당 20영이란 말은 생소하다. 서하당 주변도 예전에는 풍광이 매우 아름다웠다 한다. 솔 그림자 비치는 창(松窓), 달빛 비치는 방 문(月戶), 거문고 타는 난간(琴軒), 서가, 약초밭(藥圃), 연못에 핀 꽃(蓮池), 돌우물(石井)등 20가지 풍광이 있었다 한다. 그리고 석천 임억령과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등이 이에 대한 시를 썼다.






  나는 송강이 쓴 서하잡영 4수가 적힌 편액을 살펴본다. 이 편액은  5언4구 한시인데 제목이 송창, 서가, 금헌, 약포 이다. 이중 송창과 금헌에 대하여 감상하여 보자.






송창 (松窓)                                      






지친 나그네가 잠을 설치고는



한밤중에 홀로  창가에 기대었네.



끝없이 쏟아진 만 골짝 빗물이  



십리 앞 강변을  지나가누나.






倦客初驚睡      中宵獨倚窓    



無端萬壑雨      十里度前江






  여기서 지친 나그네는 송강 자신이다. <성산별곡> 첫머리에 나오는  ‘어떤 길손’이 송강이듯이, 송강은 이 시에서 자신을 ‘객’이라고 표현 하고 있다. 객이라 함은 한 곳에 계속 머무르지 않고 언제라도 떠날 사람이다. 네 번이나 창평에 낙향 온 송강은 낙향 할 때 마다 아예 머물지는 않았다. 도연명처럼 <귀거래>는 없었다. 그는 낙향하여 머물면서도 언제든지 임금이 부르면 어와 성은이야 하고 달려 나갔다. 그런 그의 심정이 이 시에도 은연중에 비치고 있다.






금헌(琴軒)






그대에게 한 장 거문고가 있어



소리가 세상에 드문 대음일세.



대음은 알아듣는 사람이 적어



흰 구름 깊은 곳에서나 한다네.






君有一張琴    聲希是大音    



大音知者少    彈向白雲深






  이 시에서 ‘그대(君)’는 서하당 김성원이다. 서하당은 거문고를 잘 탔다고 한다. 그 솜씨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솜씨를 알아주는 사람이 적어 이 시의 표현처럼 혼자서 흰 구름 깊은 곳에서나 거문고를 탔나 보다. 3구의 ‘대음은 알아주는 사람이 적어’는 중국의 고전 <열자>에 나오는 일화와 관련이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진나라의 고관 백아(佰牙)는 거문고의 달인이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알아주는 종자기(鐘子期) 라는 친구가 있었다. 한번은 백아가 높은 산에 오르는 생각을 하고 거문고를 탔더니 종자기가 듣고서 ‘좋구나, 그 소리 우뚝 솟은 태산과 같구나.’ 하였다. 또 한 번은 흐르는 강물을 생각하며 거문고(琴)를 탔더니 종자기가  듣고서 ‘정말 좋다. 거문고 소리, 양양한 강물이구나.’라고 말하였다. 종자기는 백아가 생각한 것을 그대로 알아맞히는 이심전심의 친구이었다. 그런데 종자기가 갑자기 죽자 백아는 슬픔에 잠기어 ‘지음(知音)이 없다’면서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거문고의 줄을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 여기서 유래한 고사성어가 백아절현 佰牙絶絃, 절현 絶絃, 지음 知音이다. 이 시를 자세히 음미해 보면 서하당은 백아가 되고 송강은 종자기가 된다. 백아인 서하당은 종자기인 송강이 옆에 없어 혼자서 거문고를 타고 있다.






  한편 송강의 거문고 타는 솜씨도 대단하였다 한다. 송강이 시(詩), 주(酒), 악(樂), 색(色)에 능한 풍류객임은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나는 중학교 때 월탄 박종화 선생이 쓴 대하역사소설 <자고 가는 저 구름아>를 읽은 적이 있는 데 그 책에 평안도 강계에서 유배중인 송강이 거문고를 타고, 기생 강아가 사미인곡을 부르면서 함께 지내는 장면이 나온다.






  운 좋게도, 나는 <국역 송강집>에서 송강이 거문고 타는 모습을 쓴 한시 하나를 찾았다.






차가운 비 후두둑 대숲을 울리나니



어찌하나 아득아득 마음만 초조하여라



숨어 사는 사람 스스로 일도 많아



한 밤에 홀로 앉아 거문고를 타노라.






萬竹鳴寒雨         迢迢江漢心 



幽人自多事         中夜獨橫琴






  ‘즉석에서 짓다(卽事)’라는 5언 절구이다. 대숲이 나오는 것 보니, 아마 창평 낙향시절에 대나무 골에서 지은 시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만 초조 하여라’는 아직 임금이 송강을 부르지 않아 초초하다는 송강의 심사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고 조용히 마음을 다독거리면서 한 밤에 혼자서 거문고를 탄다. 아마 거문고의 음은 쓸쓸하고 다소 처연한 것이었으리라. 낙향의 고독과 비애.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고.   






  이제 서하당 김성원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자.



서하당 김성원(1525-1597). 그는 송강과 같이 김윤제 문하에서 동문수학 한 사이이다. 나이는 송강보다 11살이나 많았어도 송강과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서하당은 김윤제의 조카이며 송강의 처삼촌이다.) 그는 1558년에 생원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성산 주변의 자연에 묻혀 풍류를 즐기며 유유자적하게 산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그의 효행이 이름 나 1580년(선조 14)에는 강원도 찰방등 벼슬을 제수 받기도 하였다. 또 임진왜란 때에는 화순동복에서 군량을 조달하여 의병을 도왔으며 그의 조카 김덕령을 돕기도 하였다. 그런데 1597년 정유재란때 노모를 등에 업고 화순 동복 모후산으로 피난을 가다가, 왜적들이 노모를 해치려 하자 노모를 보호하려다 함께 죽었다. 그의 순효비가 그 산에 세워졌는데 주암댐의 축조로 수몰이 되어 지금은 무등산 충장사 앞에 옮겨져 있다 한다.






  서하당 김성원은 송강 정철이 지은 가사 <성산별곡>의 서하당, 식영정 주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성산별곡 첫 머리에 나오는 ‘적막 산중에 들고 아니 나오는’ 은자(隱者)가 바로 김성원이다.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 산중에 들고 아니 나오신가.






  그런데  송강과 서하당은 평생 친구였다. 송강은 서하당에 대한 시를 여러 편 쓰는 데 그 때 마다 서하당이 그의 평생 친구임을 밝히고 있다.   






멀리 하당주인에게 부치다






하당 늙은이 그대는 평생 나의 친구라



꿈에서도 잊기 어려워



나는 시방 속세를 헤매지마는



그대는 홀로 구름 산에 누워 있구려.






遙寄霞堂主人  



                             



霞老平生友  難忘夢寐間    



吾方走塵世  君獨臥雲山    






  송강은 이 시에서 서하당이 평생친구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평생 친구란 30년 친구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송강이 16세에 서하당을 만났으니 이 시는 그가 적어도 40대 후반을 넘어서  쓴 것이리라. (송강이 40살인 1575년은 이조정랑 자리를 둘러싸고 김효원(동인)과 심의겸(서인)의 동서분쟁이 본격화된 시기이고 이때 송강은 창평에 처음 낙향을 하였다. 그리고 50세에는 네 번째 낙향을 하여 송강정에서 주로 머무른다.) 






  이 시의 3.4구는 송강과 서하당의 삶이 잘 대조된다. 3구에서 ‘나는 시방 속세를 헤매지마는’은 송강의 마음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다. ‘나는 지금 속세에서 임금을 모신다고 당쟁이나 하면서 속을 끓이고 있지마는’ 뜻 같기도 하다. 그러면서 속세를 헤매고 있는 자신이 조금은 처량해 보인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그런데 4구는 ‘그대 서하당 당신은 홀로 구름 덥힌 산, 신선이 사는 산에 누웠구려. 홀로 숨어 살면서 유유자적하고 있구려. 그런 당신이 나는 조금은 부럽구려.’ 라는 송강의 속내를 나타내고 있다.  






  한편 아래의 한시도 송강과 서하당의 돈독한 우정을 알게 하는 시이다.






  멀리 서하당 주인에게 부치다(김성원공)   






  골육 간에도 서로 길을 달리하고,



  친한 벗도 혹은 앙숙이 되는데



  사귀여 늙도록 정을 지키기는



  세상 천지에 오직 그대  뿐이네.



 



   遙寄霞堂主人 金公成遠    






   骨肉爲行路    親朋惑越秦    



   交情保白首    海內獨斯人



     



  이 시에서 보듯 송강은 서하당을 이 세상에 오직 ‘그대뿐인 친구’라고 표현하고 있다. 형제간, 친한  친구 간에도 흔히 사이가 벌어지기 마련인데 서하당 당신은 늙도록 정을 지키는 유일한 나의 친구라고 시에서 적고 있다.






 또한 삼십년 전에 송강이 서하당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시도  두 사람의 우의를 알 수 있는 시이다.






하옹이 옛 편지를 내어 보이다.






삼십 년 전의 편지를 보니



종이 위에 쓰인 말이 정녕 간절해라.



먹자취는 어제처럼 새로운데



사귄 의는 늙어서 더욱 돈독하네.



먼지나 좀벌레에게 줄게 아니라



마땅히 자손에게 보여야 하네.



친한 벗이 천지에 가득하건만



손을 뒤집어 구름도 되고 비도 된다네.






霞翁以舊書出示  






三十年前札    丁寧紙上言    



墨痕新似昨    文義老彌敦    



未可輸塵蠹    端宜示子孫    



親朋滿天地    雲雨手能飜    






  송강이 30년 전에 서하당에게 보낸 편지를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그리고 사귄 우정이 이렇게 돈독함을 새삼 느낀다. 이런 편지는 고이 간직하여 마땅히 후손들에게 보여야 한다. 지란지교는 영원히 기록될 가치가 있으니까.






  송강이 아닌 보통 사람이라도 몇 십 년 전에 받은 편지를 다시 꺼내 보면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그것이 연애편지이건 친구와의 안부편지이건 간에. 한편 그런 편지를 오랫동안 서하당이 간직한 것 또한 지극 정성이다.






  마지막의 ‘손을 뒤집어 구름도 되고 비도 된다’ 글은 중국 당나라 의  시성 詩聖 두보(712-770)의 빈교행(貧交行: 가난할 때의 사귐)에서 나온 말이다.






손을 뒤집어 구름을 만들었다가 손을 엎어 비도 만드니



어지럽게 경박한 사람을 어찌 말해 무엇 하리.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관중과 포숙이 가난하였을 때 사귀던 모습을



요즘 사람들은 이 도를 마치 흙처럼 저버리네.






飜手作雲覆手雨       紛紛輕薄何須數



君不見管飽貧時交     此是今人棄如土



 



  예전이나 지금이나 세상인심은 권세에는 아부하고 가난해지면 멸시하는 염량세태이다. 잘 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몰락을 하면 그 많던 주위의 사람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늘상 보는 일이다. 그럴 때 일수록  관포지교는 더욱 빛난다.



 

 



                            <서 하 당>



 



                                         <식 영 정>


  • 정보 담당자 :
  • 관광정책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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