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담주리(潭州里)
  • 담주리(潭州里)는 본래 담양군(縣·府)의 서변면(西邊面)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외천리(外川里), 마지내리(馬池內里), 마외리(馬外里) 천변리의 각 일부를 동변면의 북우리(北右里)와 합하여 담양의 옛 이름을 따라 담주라 불러왔다. 담주현(潭州縣)의 역사적 증현(證現)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담주마을로 이름하였다
천변리(川邊里, 3개로 분구)
  • 천변리는 1300년 말경 담양인 국무(鞠珷)가 고려의 멸망으로 개성에서 피란차 이곳에 들어와 지금의 23번지 부근에 터를 잡았다. 조선조 말엽까지 서변면에 속하였던 지금의 천변리는 당초의 누문리 일부와 간리 일부를 합하여 천변리에 편입했다. 천변리란 읍의 동쪽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남산들을 거쳐 마을을 가로지르고 담양천이 마을의 서쪽을 지나 흐르기 때문에 강변의 연안을 표현한 것이다.
지침리(紙砧里, 4개로 분구)
  • 원래는 담양군 동변면의 지역으로써 교방(기방)이 있었다 하여 교방거리, 조방거리 또는 교촌 지침이라 하였다. 1914년 담양군과 창평군의 통폐합에 따라 득삼리(得三里), 간동(間 洞), 마구리(馬口里)의 각 일부를 합하여 지침이라 이름하고 담양읍에 편입하였다. 과거 본 마을에 제지공장이 있어 지침리라 이름하였다.
객사리(客舍里, 3개로 분구)
  • 조선조 때 임금의 명을 받아 지방에 내려오는 관리를 접대한 곳을 객사 또는 관우라 한다. 담양에 처음 객사가 건립 된 것은 선조 35년(1602) 이다. 그 후 부사 김이가 동상헌을 객사 동쪽에 건립하여 모든 공사를 관에서 처리하며 당시의 심장부 역할을 한 곳이 지금의 객사리다. 객사(客舍)마을은 본래 담양군 동변면의 지역으로써 현 동초등학교 일대에 조선조 때 객사가 있었기 때문에 부르게 된 이름이다.
백동리(栢洞里, 7개리로 분구)
  • 삼거리, 신기마을, 내동, 서당골, 미리산마을로 나누어지며 삼거리와 내동 일부의 서남쪽을 창고등이라 불렀고 백동1리를 향백동이라 칭하며, 주민들은 대부분 대대로 살아온 토착 주민들로 구성되었으나 청전아파트는 주민이 외지에서 입주하여 주민들 상호간의 이질감이 상존, 단일 행정리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청전아파트에 대해서 백동 5리의 분구를 2000년 3월 27일 담양군 조례 제1629호로 개정, 동년 5월 1일 백동5리로 하고, 서당골을 백동 6리로 분구 2005.1.1일 담양군 조례 제 1774호로 개정되었다. 삼거리와 서당골은 고려 중엽 현재의 향백동과 동시에 형성되기 시작한 마을로 추정되지만, 마을의 정확한 형성 연대에 관한 기록을 확인하기는 힘들다. 다만, 1914년 담양군과 창평군이 통합되면서 신기리, 내동, 삼거리, 향배동 일부, 두곡리 일부를 합하여 백동리라 하고, 담양읍에 편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로 삼거리와 서당골에는 점차 인구가 유입되고, 호수가 늘어나게 되었으며, 1961년 담양군 조례 제2호에 의해 백동리가 백동리 1구와 백동리 2구로 되었다가, 1990년 백동리 2구로부터 미리산이 백동리 4구로 분구되어 나가고, 현재는 삼거리와 서당골만이 백동리 2구에 속한다.

    백동리 2구는 담양읍에서 찾기 힘든 인재 교육의 요람이다. 이는 서당골에 담양 국씨들이 입향할 당시 관에서 서당을 지어 학문을 장려했었다고 전해오는 사실, 그 후 일제시대에는 삼거리 254번지에 광덕학교를 세워 인재를 키웠었다는 사실, 그리고 1997년 백동리 2구 256-4번지에 담양군 공공도서관이 신축되어 담양군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 육성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사실 등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또한 최근 백동리 2구의 발전 상황은 담양읍 도시발전의 중심 축을 급속히 이곳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농업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당시 관에서 축조하였던 백동리 2구 백동저수지가 1990년 매립되었고, 그곳에는 축산업협동조합, 임업협동조합, 신용협동조합, 농업기반공사, 한국전력공사, 경찰서 등 관내 주요기관들이 들어서고 있다.
남산리(南山里, 2개로 분구)
  • 남촌(南村)마을은 본래 담양군 동북면의 지역이었다. 남산 밑에 위치하고 있어 남산 또는 남촌이라 하였다. 동남간으로는 남산의 맥이 흐르고 서북간은 멀리 추월산과 병풍산, 삼인산을 바라보며 옥답이 정원처럼 앞뜰에 펼쳐져 있어 농촌의 풍경이 좋은 마을이다. 이런 의미에서 남촌이란 이름은 부드러움과 평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동정자(東亭子)마을은 객사 동편에 축요루가 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동정자 또는 동정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예전에 마을의 큰 나무를 정자라 했는데 동쪽에 정자나무가 있어서 동정자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하여 온다.
향교리(鄕校里, 3개로 분구)
  • 향교(鄕校)마을은 1930년경에 담양 전씨의 시조 전득시가 경대산(檠臺山) 기슭 현 향교터에 자리잡아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 오고 있다. 향교리는 원래 생기, 언골, 서원마을이라 하였고 그 이후에는 광동, 취영, 향교라 불리었으며, 참빗 고장이라 이름하여 추월 삼촌이라고 불렀다. 취영(取英)마을 본래 이름은 “서원내”였다. 담양읍 향교리 149번지 의암서원 옛터가 있다. 의암서원에서 많은 선비가 배출되어 영재와 수재가 속출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취영 이라 이름 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성리(萬成里, 2개로 분구)
  • 본래 이 마을은 담양군 서변면(西邊面)의 지역으로서 완동(完洞) 또는 만성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봉산리와 동변면(東邊面)의 광동 일부를 병합하여 만성리라 하여 담양면에 편입하게 되었다. 또한 만성리의 일부를 와우동(臥牛洞)이라 불러온 것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완동이라고 그 칭호가 변하기도 하였다. 만성리(萬成里)는 예부터 추월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만사가 잘 이루어진다 하여 만성리(萬成里)라 이름하였다는 설도 전해오고 있다. 행정상으로 만성리(萬成里)는 사실상 당초에는 한봉(韓蜂)의 집단적인 생산지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꿀이 유명하여 벌뫼라 불러오다가 봉산(蜂山) 마을로 불러왔다.
양각리(羊角里, 2개로 분구)
  • 시산(匙山)마을은 담양군의 서변면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당시의 시산마을과 고산동, 사미정 마을을 병합하고 양각산 아래에 자리 잡았다 하여 양각리라는 이름으로 담양면에 편입되었다. 양각리는 뒷산인 양각산이 염소 뿔 형국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시산마을은 “술뫼”라고도 하며 지형이 숟가락처럼 오목한 형국이다. 사미정(四美亭)마을은 담양 전체 지맥으로 볼 때 고대실이 용머리에 해당하고 사미정은 용꼬리에 해당된다고 한다.
강쟁리(江爭里, 3개로 분구)
  • 강쟁마을은 강이 흐른다 하여 물강(江), 물줄기가 서로 합류되어서 싸우는 듯 하다하여 다툴쟁(爭)을 따서 불리어 온다. 두곡(斗谷)마을은 서북쪽 불태산의 오송(蜈松)이 마치 기어들어오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신성(新聖)마을은 원래 구도로를 중심으로 아랫마을은 봉산면 두곡리에 속해 “창고등”이라 불리었고 윗마을은 무정면 반룡리에 속해 말머리라는 뜻의 “마두리”로 불리었다.
반룡리(盤龍里, 3개로 분구)
  • 반룡마을의 지형에 대해서는 “담양남오리허(潭陽南五里許) 반룡지중롱주(盤龍地中弄珠) 수유괘표지형(雖唯掛瓢之形) 사십구대청한지지(四十九代淸寒之地)라는 말이 전해 온다. 이를 풀이하면 담양으로부터 남쪽으로 오리 지점의 연못 가운데 서린 용이 구슬을 희롱하는 형이라 하여 반룡이라 하였고 또한 바가지를 걸어 놓은 형으로써 49대에 걸쳐 청백한 수재가 배출한다는 뜻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반룡이라 칭하였다고 전해 온다. 용주마을 반룡마을에서 볼 때 지형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용주마을이라 부른다. 또한 죽산마을에서 바라보면 동산의 형국이 송아지형 뫼로 보인다 하여 독뫼라고도 한다.
오계리(五桂里, 3개로 분구)
  • 1600년경 개촌되어 오현동이라 하였는데 마을뒷산인 남산을 옥녀봉 또는 옥녀탄금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거문고줄에 비유하여 명명하였으며 그 후 오계리라 개칭 하였고, 계동마을은 담양읍 오계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계수나무가 있었다고 전해 온다. 마을 좌우후편에 계양산이 감싸고 있다하여 계동(桂洞)이라 하였다.
학동리(鶴洞里, 2개로 분구)
  • 마을이 형성된 당시 주산리라고 불러온 것은 담양의 터가 행주형에서 연유한 것이다. 배를 매는 곳이라 하여 주산이라 불렀다. 그 후 영조 26년(1750) 마을 뒷산의 형세가 학의 몸을 닮았다 하여 학동으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학이 머무르는 명당 터로 옛날 마을 앞 북쪽들은 호수와 갈대가 우거져 사계절 내내 많은 학이 모여 들어 장관을 이루었다 한다.
    심곡(深谷)마을은 마을이 자리잡은 곳이 깊은 계곡이라 하여 심곡 즉 “깊은실”로 불리다가 지금은 “짓푸실”로 불리고 있다.
금월리(錦月里, 2개로 분구)
  • 연화촌 마을은 마을 뒷산이 연화봉 같다 하여 마을 이름을 연화촌으로 불린다. 과거 금월마을에는 원율천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옥녀봉 아래까지 흐르며 만들어 내는 소가 있었는데 옥녀탄금 모습이 소의 물에 비치는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워 이곳을 금강소라 하였다고 한다. 또 금강소의 물속에 달이 비치는 풍경이 극치에 달한다 하여 마을 이름을 금월이라고 불렀다.
삼만리(三萬里, 3개로 분구)
  • 오정마을 이름은 옛날 마을 앞에 큰 오동나무가 있었고 그 밑에 정자가 있어 오정이라 불렀다. 옛 사람들은 머귀나무(오동나무)가 서 있는 마을이라 하여 “머귀쟁이”라고도 불렀다. 내동(內洞)마을이름 유래는 깊은 골짜기 안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안동네라 부르고 지대가 높다하여 고대실이라고도 불러오고 있다. 선계(仙界)마을은 삼무사의 스님들이 입적할 때 선계 터에서 화장하였다 하여 선계마을이라고 불렀다. 그 전에는 불로동(不老洞)이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운교리(雲橋里)
  • 장월리 또는 구름다리로 불러오다가 조선말엽부터 운교리라 개칭하였다.
삼다리(三茶里, 2개로 분구)
  • 약 500여년 전부터 다전리(茶田里)라 불러오다가 동다(東茶), 서다(西茶), 외다(外茶) 등 3개마을을 총합하여 삼다리라 개칭하였으며 다시 내다마을과 외다마을로 구분되었다.
가산리(佳山里, 2개로 분구)
  • 고가뫼마을은 당초에는 마을이 고가산 아래에 위치하여 “고가뫼”라 부르다가 “고가산”으로 바뀌고 다시 “가산리”로 불렸다. 조선조 영조 때에는 “담양부 목산면 내동”으로 불렀던 기록이 남아 있다.
    회룡(會龍)마을은 용마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생말로 불러오다 조선 말엽 용들이 몰려있는 지형이라하여 회룡이라 바꾸어 부르고 있다.
<군지 및 자료제공자 : 담양향토문화연구회, 정보출저 : 옛땅 옛터 옛이름, 저작권자 : 이해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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