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원천리(내천마을)
  • 후삼국시대(서기 900년경)에 큰 샘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하여 천동(泉洞)으로 불리웠다. 후에 바깥쪽 마을과 구분을 위해 안시암골로 불리웠으며 조선영조 34년(서기 1758년)에는 담양부 천동면에 속했었다. 고종 32년(서기 1895년)에 내천면에 소속하면서 내천마을로 개칭되었고 서기 1904년에는 천면에 소속하였으며 1914년 3월 금성면 원천리 내천으로 불리우게 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천리(외천마을)
  • 후삼국시대(서기 900년경)에 큰 샘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하여 안쪽마을과 함께 천동으로 불리웠다. 후에 안쪽마을과 구분하기 위해 바깥시암골로 불리웠으며 조선영조 34년(서기 1758년)에는 담양부 천동면에 소속하였고 고종 32년(서기 1895년)에 외천면에 소속하면서 외천 마을로 개칭되었다. 1904년에는 천면에 소속됐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금성면 원천리 외천으로 불리워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석현리(석현마을)
  • 조선 세종 때(145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돌 많은 고개(가리채)에 마을이 있다하여 석현(石峴)이라 불리웠다. 조선영조 34년(서기 1758년)에는 담양부 천동면에 소속하였고 고종 32년(서기 1895년)에는 외천면에 소속하였으나 1914년 3월 고지 산면의 와룡촌, 산이천리의 일부를 합하여 금성면 석현리 석현 마을로 불리우게 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이 마을에는 면사무소, 농협, 파출소, 면대(중대본부), 우체국, 초등학교 등이 소재하고 있다.
석현리(무림마을)
  • 삼국시대 백제 개루왕(서기 15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뒷산이 마치 호랑이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호랑이는 숲이 무성해야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다하여 풍수지리설에 영향받아 이름을 무림동(茂林洞)이라 했다. 조선 영조 34년(서기 1758년경)에는 담양부 천동면에 속하였고 고종 32년에는 외천 면에 소속하였으며 1904년에는 천면에 속하였다. 1914년 3월 금성면 석현리 무림으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성리(정각, 양지마을, 반디마을)
  • 고려 경종때(서기 980년경)에 정각산록 와곡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고려 공양왕 3년(서기 1391년) 까지 율원현에 속하였으며 마을지형이 송아지가 엎드린 형국이라 하여 정각(正角)마을이라 불리우게 됐으며, 양지(陽地)마을은 양지촌 이라 불리우다 양지마을로 개칭되었다. 조선 영조 34년(서기 1758년)에는 용천 동면에 소속하였고, 1904년부터는 용면에 소속하였으며, 1914년 금성면 대성리 정각, 양지마을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원마을로 조성된 반디마을은 2009년 6월 15일 대성1구에서 대성3구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성리(대성, 봉곡마을)
  • 고려 경종때(서기 9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고려 공양왕 3년(서기 1391년)까지 율원현에 소속하였으며 율원현이 폐현되기전 향교의 대성전이 있어서 대성마을이라 했고, 벌을 많이 사육하여 봉곡이라했다 한다.
    조선 영조 34년(서기 1758년)부터는 천동면에, 고종 32년(서기 1895년)부터는 외천면에, 서기 1904년부터는 천면에 소속해 있었다. 서기 1914년부터 금성면 대성리 대성, 봉곡마을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율리(원율마을)
  • 삼국시대 백제때 율지현의 소재지였다. 통일신라 경덕왕 16년(서기 757년)에는 율원현의 소재지였으며 고려 공양왕 3년(서기 1391년)부터 율원현이 담양에 소속됨에 따라 현이 폐지되었다. 조선 영조 34년에 발간된 추성지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고지산면에 속해 있었으며 서기 1904년에는 고면에 속해 있었다. 서기 1914년에 원율 마을로 고쳐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율리(오평마을)
  • 후삼국시대(서기 9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서남쪽 방향에 있는 산의 형태가 자라등과 비슷 하다하여 자라골 또는 자라등 이라 불리웠다. 고려초기에는 율원현 소재지였다. 고려 공양왕 3년(서기 1391년)부터 율원현이 담양에 소속됨에 따라 현이 폐지되었다. 조선시대 자라오자를 써서 오평마을 이라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금성리 (평신기, 부곡, 문암마을 )
  • 평신기 마을은 조선 효종 때(서기 165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본 마을 형성 이전에는 뒷산너머 분단 등불로촌 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이 괴질로 인해 무곡 뒷산너머 가마실 에서 거주하였고 후에 농경지가 많고 토질이 비옥한 이곳에 터를 잡았다. 평지에 터를 잡았다하여 평신기로 불리운 이래 현재 에 이르고 있다. 문암 마을은 조선 영조 11년(서기 1735년경)에 마을이 형성 되었다. 마을 반대편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금성천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무넘어(물넘어)라 불리웠다. 조선 고종 때(서기 1890년경)에는 실제로 불리웠으며 1914년 문암마을로 고쳐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곡마을은 1760년경(조선영조)에 옥천의 조씨 문중의 황씨 할머니가 광덕리 지금의 문암리에서 두 아들을 데리고 넘어와 가마실에서 여양진씨와 설씨가 함께 살다가 마을에 역병이 번져 못살고 이곳에 터를 옮겨 살았는데 마을 뒷산이 가마솥형이요 그 옆에 통 샘이 있고 뒷골이 굴뚝과 같다 하여 마을 이름을 가마실 또는 가마골로 불러오다가 부곡이라 했다.
금성리(하성마을)
  • 조선 선조때(서기 159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지형이 나룻배 형국이라 하여 주진리로 불리워왔다. 조선 철종때(서기 1855년경)에 산성옆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토성리로 불리웠으며 고종때(서기 1890년경) 금성산성아래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하성마을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덕성리(덕성, 영월, 행정마을)
  • 덕성마을은 통일신라 경순왕때(서기 93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주변에 노적봉이 있고 당그래봉이 있어 그 가운대 마을이 위치한 것에 비유하여 노적봉에서 당그래로 곡식을 끌어내려 덕석에 말리는 형국이라 하여 덕석으로 불리웠고 덕석이 점차 덕성으로 변천 조선시대말부터 덕성으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월마을은 마을형성 연대가 명확하지 않다. 조선시대에 호남지방을 순시하던 임금이 편히 잘 쉬어 간 곳이라 하여 언안 이라 불리웠다. 후일 밝은 달이 순창 해미산에 솟으니 그곳에서 달맞이를 하였다 하여 영월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행정마을은 형성연대가 명확하지 않다. 마을에 정자와 은행나무가 같이 있어 행정마을이라 불리웠다 한다.
덕성리(시목마을)
  • 시목 마을은 조선 선조 때(서기1580년경)에 담양 田氏 가 이주해와 13代째 살아오고 있는 곳이며 마을 뒷산에서 옛 기와와 주춧돌 등이 출토되어 田氏 入鄕 이전부터 살아온 옛 터라 전한다. 마을 뒤 白虎 등에 있는 감바위는 순창군 금과면 방축에서 능동, 목동마을로 왕래하는 사람들이 감을 따 이 바위에 앉아 쉬면서 허기를 달래었다하여 감바위라 했다한다. 마을 위치는 도계와 경계해있고 면소재지와는 6Km 지점에 위치하여 교통이 불편한 지역이다.
봉서리(장항, 대판마을)
  • 장항마을은 조선 연산군 때(서기 15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뒷편에서는 백제 성왕 때 (서기550년경) 주민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옛 기와 주춧돌,샘터등의 잔해가 발견되고 있다. 이곳을 고가지터라 부른다. 노루의 목 부분에 위치한다 하여 장항마을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판마을은 조선 선조 때(서기 15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비탈진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대판마을이라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봉서리(와룡마을)
  • 고려 문종 때(서기 1050년경)에 처음으로 海州 崔氏 에 의해 개척된 것을 비롯 1591년경 선조 24년 海州 崔氏 文忠公 天範 이 화순에서 살다가 이 곳에 터를 잡았다. 광산 金氏는 1670년경 창평면 장화리에서 이거해와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 해주 최씨와 광산 김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마을 뒷산이 용이 누워있는 형국이라 하여 와룡리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봉서리(비내동 마을)
  • 고려 인종 때에 河氏 들에 의해 개척된 이후 인동 張氏가 안동에서 살다가 개척하였으며 海州 崔氏 文忠公 天範 후손이 입향 하여 살고 있음. 지형이 병풍을 두른 듯 산이 둘러있고 봉황이 알을 품은 듯 하여 마을 이름을 鳳所라 불러오다가 봉서리라 했고, 각처의 봉황이 날아드니 비내동(飛乃洞)이라 하였으며, 1986년 8월 8일 비내동이 봉서3구로 분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곡리(대곡마을)
  • 고려 명종 때(서기 117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형성당시 대곡이라 불리어 왔으며 고려 원종때(서기 1270년경)에 지형이 동남북 원형으로 산이 둘러싸여 있어 마치 비단으로 띠를 두른 듯 하다하여 대곡이라 불리워 왔다. 조선 영조 34년(서기 1758년)에 편찬된 추성지에 의하면 당시 고지산면에 속하였으며 서기 1914년 3월 행정구역 개편 대곡리에 소속토록 하여 대실마을이라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곡리(손곡마을)
  • 손곡 마을은 마을형성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고려 현종때(서기 1660년경)에 봉산면 상덕리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창평면 현암을 거쳐 이곳에 이주한 기록이 있을 뿐 (향사의 맥 3권)이다. 비봉산과 서암산의 지맥이 서북방향으로 뻗어 내려 마치 소가 누워(臥牛)있는 형국이라 하여 손우실(巽牛實)이라 하였으며, 1914년 3월 행정구역 개편시 대곡리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곡리(산이천마을)
  • 산이천 마을은 후삼국시대 때(서기 9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을 형성당시 산곡으로 불리다 조선시대 중엽부터 산이천 마을로 불리웠으며 1914년 3월 행정구역 개편시 대곡리에 편입되었고 대곡 3구로 1995년6월24일 대곡2구에서 대곡3구로 분구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외추리(외추, 노천동, 매곡마을, 마각제)
  • 외추 마을은 삼국시대 사용 토기가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서기 6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 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마을 이름을 추동으로 불러오다가 조선 고종때 외추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노천마을은 통일신라 경덕왕때(서기 75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이름을 양동으로 불러오다가 조선 선조때 (서기 1595년경)부터 노천동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매곡마을은 형성연대를 알 수 없으나 조선 선조때에 이 마을에 거주하던 청계 김응회 창의사에게 선조가 흑매 1폭을 하사하였다하여 어매마을 또는 매곡이라 불리웠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3개마을 모두 외추리로 합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각제는 외추리 매곡 남쪽에서 무정면 봉안리 부안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말처럼 형국을 해 불리어 오고 있다.
봉황리(상신기, 죽림, 가라곡 마을)
  • 상신기마을은 조선 숙종때(서기 17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죽림, 가라곡에 비하여 늦게 형성된 마을로 새로운 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상신기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죽림마을은 조선 연산군때 (서기 15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대숲이 있다하여 죽림마을이라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가라곡 마을은 고려 공민왕 때(서기 1355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가라실로 불리 웠으며 조선시대 부터 가락곡으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비봉산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하여 봉황리로 불리운 이래 3개 마을 모두 봉황리로 불리우고 있다.
<군지 및 자료제공자 : 담양향토문화연구회, 정보출저 : 옛땅 옛터 옛이름, 저작권자 : 이해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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