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두장리 두장(斗長)마을
  • 170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마을의 형태가 곡식을 담아 놓은 두지와 같다하여 두지동(斗支洞)이라 불렸다. 1914년행정구역 개편시 용면에 소속하였으며 이때부터 두장(斗長)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두장리 장찬(長贊)마을
  • 162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마을에 장터가 형성되었다하여 장챙이로 불리어오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두장리 장찬(長贊)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통천리 박곡(泊谷)마을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청주 韓 氏 18세손 한록(병조판서추서)은 아들 홍충과 같이 금산 전투에 참전 하였으나 사태가 여의치 못해 이순신 장군과 합류하기 위해 전라도 지역으로 후퇴하며 대소항전을 계속하였으며 전난이 끝나자 그 지역에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하고 아들 홍충은 마을 이름을 본인의 자(휴종)과 같은 뜻인 박(泊)자를 사용 박실(泊室)로 하였으며 1914년 행정 개편때 박곡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통천리 매월(梅月)마을
  • 16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주변의 소나무에 흰 학이 많이 살고있어 학유정(鶴遊停)라 불리웠다 한다. 1810년경부터 달빛에 반짝이는 매화꽃 운치가 아름다움 마을이라 하여 매월(梅月)로 불려지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에 개편시 통천리 梅月이되었다.
통천리 통천(桶泉)마을
  • 159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통샘이 있다 하여 통시암 마을로 불리었다. 1914년 행정구역에 개편시 통천(桶泉)마을로 불렀으며, 지금도 통새암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추성리 추성(秋成)마을 163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며, 숲이 울창한 마을이어서 숲거리로도 불리웠고, 숲거리를 둘로 나누어 추성리, 치등리로 부르기도 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천면에 소속되어 있던 신흥리(현 와산마을)와 합하여 추성리(秋成里)로 부르게 되었다.
추성리 와산(臥山)마을
  • 1790년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을 형성당시 새로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고 불리우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말부터 914년 이전까지는 외뫼, 신흥리 등으로 불리워 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천면에서 용면 추성리에 편입되면서 추성리 와산(臥山)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추성리 신흥(新興)마을
  • 1990년 7월 9일 담양군이 장정수조례개정으로 추성마을에서 분리되어 추성리 3구가 되었다. 이때부터 신흥(新興)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쌍태리 쌍태(雙台)마을
  • 조선 중엽 때 마을이 형성되었다. 상월(上月), 태월(台月), 삼태(三台)등 3개 자연마을이 1개 운영마을을 이루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3개 자연마을을 합하여 쌍태리(雙台里)로 개칭하였다.
도림리 도림(道林)마을
  • 16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안쪽마을을 안되뱀이, 바깥쪽마을을 바깥되뱀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도림(道林)으로 개칭하였다.
월계리 월계(月桂)마을
  • 153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주변경치가 달속의 월계수와 같다하여 월계(月桂)라 했다 한다. 조선시대 말에는 복룡(伏龍), 월계(月桂), 월암(月岩), 신령(新令), 월성(月星), 진수동(進水洞) 등의 마을이 있었으며, 담양호 건설로 일부 마을이 수몰되고 지금은 월계마을과 복룡마을을 합쳐 월계리로 총칭 운영되고 있다.
용연리 분통(粉桶)마을
  • 167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에 분재실(粉在實), 통사(桶事)골 등의 지명이 남아있는데 이 지명의 앞글자를 따 분통(粉桶)이라 불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대흥(大興), 분통(粉桶), 용평(龍平), 소천지(小天持), 세룡동(細龍洞), 용동(龍洞), 등과 함께 용연리(龍淵里)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1961년 10월 1일자 조례에 의거 용연리 1구 분통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용연리 용평(龍平)마을
  • 175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앞에 3거리가 있어 3거리로 불렸다. 조선시대 말부터 용평(龍平)으로 불렸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용연리 용평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용연리 용동(龍洞)마을
  • 조선 중엽 때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주변산에 소년암(小年岩)이 있는데 이 바위 이름을 少年村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말부터 6.25전란까지 세용동(細龍洞)과 용동(龍洞)의 두 마을로 존재하였다. 1961년 10월 1일부터 세용동과 용평을 통합 용동(龍洞) 이라 하였다.
용치리 용치(龍峙)마을
  • 마을에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10세기 이전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인근 가마골의 용소(龍沼)와 마을을 경유하는 큰 부래기재(천치고개)와 작은부래기재(견양동고개)가 있어 용치라 불린다. 인근 견양동에는 계곡의 물이 좋아 나환자들이 치유하려고 들어왔으며, 양으로 생활하였다 하여 견양동(堅洋洞)이라 불린다. 1961년 10월 1일 용치리와 견양동을 합하여 용치(龍峙)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용치리 천치(天峙)마을
  • 조선 중엽 형성된 마을로, 하늘 가까운 높은 언덕에 형성된 큰 마을이라 하여 대천치(大天峙)마을이라 불렸다. 임진왜란 이후 고개를 넘으면 전라북도, 전라북도 평야지에서 농사를 지어 천치로 들어오면 피난처로 용이하여 한때 150호가 거주하는 큰 마을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마을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1961년 10월 1일 용치리 천치(天峙)마을로 변경되었다.
산성리(山城里)와 청흥리(淸興里)
  • 이 두마을은 1976년 담양호 건설로 인하여 마을 전체가 수몰된 마을이다. 정확한 마을형성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산성리에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수백년된 당산나무와 주변의 느티나무 풍치림을 이루었으며, 매년 연초에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산성리는 성안의 성내리(城內里)와 성밖의 구암리(九岩里)와 신정리(新亭里)로 나누어졌다가 1914 행정구역 개편 때 산성리에 통합되었으며, 청흥리는 청수리(淸水里)와 부흥리(復興里), 낙천리(洛川里)로 나누어졌다가 역시 1914년 청흥리로 통합되었다.
    산성리에는 1950년 한국전쟁시 마을 전체가 소실되었으나 이후 복구되어 경찰지서와 우체국의 소재지가 되었으나 수몰로 인하여 1974년 현 추성리로 이전하고, 50여 세대 300여 명의 생활터전 또한 옮기게 됨으로써 산성리는 행정구역상 소멸하게 되었다.
    산성리, 청흥리 이외 담양호 건설로 인해 수몰된 지역을 보면 용연리 중의 분통마을 일부, 용평마을 일부, 삼거리마을 일부, 용동마을 일부, 월계리 구복마을 일부, 황등마을 일부, 월계마을 일부, 복룡마을과 도림리 일부로 5개리 15개 자연부락 416가구 2,557명의 주민이 이주하게 되었다. 2000년 10월 산성실향민망향기념사업추진회(회장 국종수)에서는 망향의 설움을 달래고 후손들에게 고향을 알리고자 도림리 산203번지 고향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 망향비를 건립하였다.
<군지 및 자료제공자 : 담양향토문화연구회, 정보출저 : 옛땅 옛터 옛이름, 저작권자 : 이해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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