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수북리
  • 수북면 소재지 마을로서 마을의 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2004.10.1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나산리, 오정리, 대방리, 풍수리 4개 마을의 일부가 편입되어 수북리가 탄생되었다.
나산리
  • 153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지형이 풍흡나대 형이라 하여 나산(羅山)이라 불리웠다. 조선시대에는 창평현 동서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담양군 수북면 나산마을이 되었다.
개동리
  • 1640년경에 형성된 마을로, 마을을 동쪽부터 개척하고 서로가 돕는다는 뜻에서 개동(介東)으로 불러오다 고종 32년(1895) 새터를 자리잡은 신기마을과 합쳐질 때 개동(開東)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 창평면 장남면에 소속하여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개동이 되었다.
정중리
  • 13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형성당시 정은리(井銀里)로 불리우다 조선중엽부터 정중리(井中里)로 불리웠으며, 조선시대에는 창평군 장남면에 소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정중리가 되었다.
황금리 금구
  • 160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동편에 있는 거북이 형태의 산 모양에서 유래하여 금구(金龜)로 불리웠다 한다. 조선시대 말까지 창평군 장남면에 소속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황금리 금구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황금리 황덕
  • 15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어, 장성군 갑향면 운산리, 주동리, 기강리 마을과 담양군 우면 황덕마을이 소재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우면 황덕마을이 소재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황금리 황덕(黃德)마을이 되었다.
고성리 고리대
  • 1280여년경에 마을리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에 창평군 동서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이전까지 신월리, 신복동, 고리, 궁암마을이 있었으며, 동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고성리로 불리웠다. 1961년 10월 1일자로 신월리, 신복동, 고리, 궁암을 합하여 고리대(古里大) 마을로 이름하였다.
고성리 월성산
  • 153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 창평군 동서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이전까지 대평촌, 성산, 화성산, 평성산마을이 있었으며 동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고성리가 되었다. 1961년 10월 1일 담양군 행정구역 조정시 대평촌, 성산, 화성산, 평성산을 합하여 월성산(月城山)마을로 정하였다.
오정리 강동/사창
  • 강동(江洞)마을은 140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1582년 처음 세워진 학구당이 위치한 마을이다. 사창(社倉)마을은 형성연대를 알수 없다. 조선시대에는 창평군 창북면 강동리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동서면의 궁암 일부와 통합, 담양군 수북면 오정리로 불리웠으며, 1961년 담양군 행정구역 조정시 오정1리가 되었다.
삼인동원오정
  • 180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삼인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삼인동(三人洞)으로 불리웠으며, 조선시대에는 창평군 장북면 삼인동과 오정이 이 지역에 소재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오정리로 하였으며, 1961년 담양군 조례에 삼인동과 오정마을을 합하여 오정2리가 되었다.
대방리 송정
  • 14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창평군 장북면 송정(松亭)마을로 불리웠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라 하였으며, 1961년 담양군 조례에 대방1리가 되었다.
대방리 중촌 원대방
  • 1400년 말경 나주인 진의집에 의해 마을이 개척되었다. 진의집이 열심히 공부하여 문과에 급제,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을에 심었다는 정자나무 두 그루가 마을 중심부에 노거수로 관리되고 있다. 조선조 때 창평현 장북면 지역으로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수북면에 속해 1961년 대방리 2구 마을로 개칭되었다.
대방리 포박, 남전, 진등
  • 191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형성당시 풍수지리학상 大舫(큰배)을 매어 놓은 자리라 하여 포박(浦泊)이라 불리웠다하며, 창평군 장북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가 되었으며, 1961년 담양군 조례에의거, 포박, 남전(纜田), 진등 등 3개 자연마을을 대방리 3구로 하였다. 2001년 농어촌 문화마을 택지가 조성되었다.
궁산리 원궁
  • 17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주산이 활과 같은 지형이라 하여 궁산(弓山)이라 불리웠다 한다. 조선시대에 광주군 갈전면 궁산리가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궁산리로 개칭되었고, 1961년 담양군 조례에 의거, 궁산리 1구 원궁산(元弓山) 마을이 되었다.
궁산리 구암/궁동
  • 구암(龜岩)마을은 13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마을 왼쪽에 있는 거북모형의 바위가 놓여 있어 구암이라 불리웠다.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갈전면에 속해 있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창평군 장북면 와룡동과 함께 담양군 수북면에 편입되어 궁산리가 되었다.
두정리 경산/두동
  • 1620여년경에 형성된 마을로, 마을의 지형이 고래형이라 하여 경산(鯨山)이라 하였다 한다. 조선시대 광주군 갈전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광주군 갈전면 두동리, 용정리, 경호리, 담양군 고면 구연동 일부를 통합하여 담양군 수북면에 편입, 두정리(斗井里)로 개칭하였다.
주평리 용구
  • 15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용구산의 정기를 받은 마을이라하여 용구동(龍龜洞)이라 불리웠다. 1914년 창평군 동서면 신정리, 가량리, 운연리와 담양군 고면 구연동 일부를 통합, 담양군 수북면에 편입되면서 주평리로 불리웠다. 1961년 담양군 조례에 의거, 주평리 1구 용구마을이 되었다.
주평리 서당/구연
  • 15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에 담양군 고면 구연동이라 불리웠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수북면에 편입되어 주평리가 되었다. 서당(書堂)마을은 구연(龜淵)마을에 속해 있었으며, 한문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어 일제시대 때부터 서당마을로 불리웠다. 1961년 담양군 조례에 의거, 구연마을과 서당마을을 합쳐 주평리 2구가 되었다.
풍수리 월산
  • 18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달과 같다 하여 월산(月山) 으로 불리웠다. 조선시대에는 창평군 장남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풍수리로 개칭되었으며, 1961년 담양군 조례에 의거, 풍수리 1구 월산마을이 되었다.
풍수리 동상
  • 14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뒷산이 동쪽을 향하여 아침식사 상을 받는 형이라 하여 동상(東床)골로 불리웠다. 조선시대에 창평군 장남면 동상동과 담양군 목면 동상동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에 편입되어 풍수리로 개칭되었으며, 1961년 담양군 조례에 의거, 풍수리 2구 동상마을이 되었다.
풍수리 미산
  • 14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풍수지리학상 고기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마을이 자리잡았다 하여 조선시대에는 담양군 목면 미산리로 불리웠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수북면에 편입되어 풍수리로 개칭되었고, 1961년 담양군 조례 의거, 풍수리 3구 미산(尾山)마을이 되었다.
남산리
  • 137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남쪽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마을이름을 남뫼로 불리워 왔다. 1704년에 세워졌다는 구산사우(龜山祠宇)터가 마을 동쪽에 유허비만 남아있다. 조선시대에 창평군 장남면 남산리로 개칭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에 편입되었다.
대흥리 원대흥/만화동
  • 15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형성 당시에는 갈연리(갈연리)로 불리웠다. 하며, 조선시대 말에는 창평군 동서면에 소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에 편입되어 대흥리(大興里)라 하였다.
<군지 및 자료제공자 : 담양향토문화연구회, 정보출저 : 옛땅 옛터 옛이름, 저작권자 : 이해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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